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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딘디버그 May 05. 2016

Under The Control

(비평) 스폰지밥은 우리의 친구인가? 아니면 통제자인가  

     주방에서 볼 법한 네모난 노란 스펀지가 바다 속에서 물고기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살아간다. 심지어 다람쥐도 잠수복을 입고 나온다. 어린 시절 자주 접했던 애니메이션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스폰지밥’ 그리고 단짝 친구 ‘뚱이’, 그의 직장 사장 ‘집게’, 직장 동료 ‘징징이’, 육지에서 내려온 친구 ‘다람이’가 등장해 펼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아낸 작품이다. 우린 TV에서 노란색 스펀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고, 그의 순수함과 기상천외한 장난에 행복해 했다. 어린 시절의 네모바지 스폰지밥은 우리의 친구였고, 오랜 시간을 그 녀석과 함께 보냈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습이라면 어떨까.   


최악의 직장 ‘집게리아’     

 스폰지밥의 직장이자, 에피소드의 중심 장소이기도 한 집게리아는 그에게 있어 삶의 이유다. 그러나, 언제나 장난이 넘치고 행복하게만 보였던 집게리아는 사실 좋지 않은 노동조건을 갖추고 있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집게사장은 시즌1의 ‘피자배달’ 편에서 집게리아가 햄버거 가게임에도 불구하고, 고객이 실수로 주문한 피자를 직원들에게 배달하라고 하는가 하면, 손님이 오지 않는 휴일에도 가게를 지키라고 한다. 심지어 ‘집게리아 파업’ 편에서는 가게 매출이 줄자 직원들에게 밀린 3개월 치 봉급 대신, 숨 쉬는 것에 대한 비용 청구서를 주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집게리아의 악랄한 노동조건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지경이다.

           

사랑스러운 스폰지밥, 비호감인 징징이      

 최악의 노동조건에도 스폰지밥은 집게리아를 아끼고 사랑한다. 그에게 있어 집게리아는 불만을 제기할 여지가 없는 파라다이스와 같다. 그것과 맞물려 애니메이션에서 스폰지밥은 성실하고, 항상 웃음을 선사한다. 전형적인 올바른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때로는 비키니시티(작중 등장하는 마을 이름)를 구하는 영웅이 되기도 한다. 반면에 징징이는 불평만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우울증이 있는 것처럼 언제나 뚱한 표정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성공하는 것이 없다. 때로는 거지가 되기도 하며, 자신보다 성공한 동창에게 열등감을 느껴 집게리아를 자신의 식당으로 속이지만 결국 실패자로 조롱당하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징징이는 스폰지밥을 괴롭히는 인물로 그려진다. 행복하게 일을 하는 스폰지밥에게 파업을 권유하고, 결국엔 그를 직장에서 해고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징징이는 스폰지밥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반대다. 시끄럽고,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스폰지밥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강조한다. 또한 그는 불평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불합리한 집게리아의 노동조건을 직시하고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누리려고 노력한다. 과연 그런 징징이가 나쁜 인물로 그려져야만 하는 것일까? 대체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스폰지밥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운동은 환영받지 못한다. 뉴스에서 파업 소식이 들려오면 왜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을 중단하면서까지 거리로 나오는지 생각하기보단, 혀를 찰 뿐이다. 한국사회의 눈에 그들은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 하고, 회사보단 개인의 이익을 위해 불평하는 징징이 같은 존재들이다. 마찬가지로 현실 속 우리도 스폰지밥이 아닌 징징이다. 스폰지밥처럼 부당한 대우를 웃음으로 넘기고, 그 안에서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가기에는 삶이 너무 고달프다. 집게리아처럼 좋지 않은 노동조건에서 근무하면서도, 혹여나 해고될까 하는 마음에 그 조건을 받아들인다. 

한편으론 현재의 부당한 상황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부당함을 참지 못 하고 문제를 자주 제기하는 사람을 공동체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바라본다.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르는 지배계급은 권력 구조를 강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는 ‘이데올로기’를 학습시키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의 학습은 대중문화 등을 통하여 무의식으로 침투해 우리의 행동과 사고를 규정한다고 말했다. 혹시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의 어려움 혹은 부당한 대우에 맞춰 행복하게 살아가는 스폰지밥이 올바른 인간상이라고 생각하게끔 통제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스폰지밥은 사랑스럽게, 더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징징이는 꼴불견인 존재로 인식되고야 말았다.

          

이제는 그 통제를 스스로 자각할 때     

 서커스단은 서커스에서 이용하는 어린 코끼리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사슬과 말뚝으로 고정시켜 놓는다. 어린 코끼리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땅에 박힌 말뚝을 빼지 못한다. 그리고 점차 자라나서 덩치가 커지고 힘이 세지지만, 자신의 이동을 통제하는 말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충분히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어렸을 적부터의 학습으로 인해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부당함에, 차별에 순응하도록 말이다.

 애니메이션에서 징징이는 그가 처한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지만, 언제나 그 끝은 실패였다. 그러나 역사를 이끌어 온 자들은 자신을 얽매고 있는 당대의 통제를 스스로 인식하고 벗어나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통제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나’들이 모인다면 지금의 부당한 사회가 조금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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