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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딘디버그 May 09. 2016

소문에 대한 고찰

(비평)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

이 글은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에 대한 작중 등장하는 단어를 제외하고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소문 :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전하여 들리는 말. 

근거 :  어떤 일이나 의논, 의견에 그 근본이 됨. 또는 그런 까닭. 

    

 여기서 한 가지 질문. 과연 소문은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이다. 그러나 소문의 주체 혹은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때론 ‘그렇다’가 되기도 한다. 이 소문의 주체는 때론 정부가, 권력을 가진 집단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근거는 진실에 가깝기보다, 다수가 믿는 것이라는 전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이때의 다수는 ‘믿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다수는 힘 또는 권력의 많음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다수는 '소수‘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이것이 진실임을 목도해왔다. 5월 18일 광주가 그러하였고, 4월 16일 세월호가 그러하였다. 한 번은 북괴의 폭동으로, 한 번은 돈만 밝히는 유가족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는가? 

 소문이 근거가 되는 또 하나의 경우가 있다. 바로 소문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려있다. 그 대상은 때론 북한, 연예인 혹은 사이비 종교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들이 대상이 되는 순간 진실은 중요치 않다. 다만 소문은 근거를 동반한 사실이 된다. 과연 그들이 정말 그 소문대로일까? 얼마 전 20대 총선을 꾸민 단어들 중 ‘북풍’이라는 말을 기억한다면, ‘디스패치’의 기사의 시기와 내용을 보고 무엇인가 연관성이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 전 급작스럽게 인터넷 검색어 1위를 기록한 ‘신천지’를 자세히 알고 있다면 더더욱 말이다.(물론 이 모든 소문이 조작된 진실인지는 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문이 때론 무자비하고, 잔인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든 그 소문에 대항해야 할 위치에 처해지기도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에 홍길동과 활빈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 영웅처럼 나타나, 잔인한 상황 속에서 구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당신이 이 영화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면, 당신은 소문의 무자비함과 잔인함에 공포를 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홍길동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떠할지? 그 소문이 사실인지. 추리와 확인은 아니더라도 관심 정도는 가져주는 것은 어떠한가. 만약 소문이 진실을 담보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은? 아마도 그것만으로 명월리 사람들에게 당신은 홍길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제훈은 멋있다. 나랑 DNA 구조는 똑같은데 왜 다를까? 

 기자를 꿈꾸는 학생으로서 아직은 미숙한 점이 많습니다. 글을 읽으시고 만약 의문점이나 잘못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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