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은 감사를 담고

양은 도시락 칸칸 엄마의 마음이, 알루미늄 도시락 칸칸 나의 마음이

by 후디리

초등학교 시절, 12시 40분 종소리가 점심시간을 알리면 나는 현관 앞으로 있는 힘껏 내달렸다. 뜨끈한 국과 갓 지은 밥을 담은 도시락을 아버지가 갖다 주시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도시락을 싸갔던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일주일에 다섯 번을 싸갔던 5학년 때까지 아버지의 도시락 배달은 멈추지 않았다. (6학년이 되어서 큰 도시로 전학을 가 처음 먹어본 보온 도시락의 미적지근한 밥은 충격이었다.)

세탁소를 하시는 엄마는 낮 12시가 되면 압력솥을 불에 올려 밥을 짓고 각종 반찬을 만들기 시작하셨고 12시 35분이면 계란 반숙이 올려진 뜨거운 밥과 세 가지 반찬, 친구들과 나눠먹으라고 국을 1 리터쯤 싸 아버지 손에 들려주셨다. 아버지는 밥과 국이 식을 새라 궁둥이에 바람소리가 나도록 빠른 걸음으로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오시는 것이다.

엄마의 도시락은 친구들에게 언제나 인기가 있었다. 손맛이 좋으실 뿐 아니라 신기한 반찬을 만들어 주시기 때문인데 삼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생각해도 신박한 메뉴들이다. 자그마한 생선을 포를 떠 깻잎으로 감싸 모양을 잡아 놓은 튀김을 빙 둘러 담고 새콤달콤 과일 샐러드를 가운데 넣어주시거나 동그랑 땡에 상추 샐러드를 생햄에 말아 주신 것, 닭고기 살을 곱게 찢어 수삼과 대추를 넣고 끓인 삼계죽 등이 그 예이다.

언제나 맛있고 기다려지는 도시락이지만 일 년에 딱 한번, 싫어질 때가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나면 엄마는 도락을 하나 더 싸주셨다. 선생님을 위한 도시락이다. 꽃무늬가 새겨진 동그란 찬합에 밥 한 칸을 담고 나머지 세 칸은 고기 한 칸, 금방 만든 겉절이 한 칸, 나물 한 칸 채우고 구수한 된장국을 따로 담으셨던 것 같다. 출근길 간단히 싼 도시락을 드시거나 버너에 라면을 끓여 찬밥과 김치를 드시기 일쑤이던 담임 선생님께 도시락을 갖다 드리면 입이 함박꽃처럼 벌어지게 웃으시며 공포스러운 말씀을 하신다. "후디리, 선생님이랑 같이 먹자." 나는 말없이 선생님 책상 옆에 의자를 갖다 놓고 밥을 먹어야 했다. 선생님은 즐겁게 말씀을 하시고 나는 아무 말 없이 입 속에 밥을 욱여넣었던 기억만 가득하다. 엄마는 우리 딸 잘 좀 봐주셔요...라는 부탁의 마음을 도시락 칸칸에 그득히 담아 보내셨을 것인데 난 '제발 엄마가 선생님 도시락을 싸지 않았으면......하는 맘이 그득했다. 엄마는 내가 시골학교에 다니는 동안 일 년에 꼭 한 번씩 선생님 도시락을 싸셨다.

큰 아이가 한국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새롭게 일 학년으로 입학을 하고 잘 지내다 이 학년이 되었을 때 집 렌트 문제로 다른 학군으로 전학을 가야 했고 아이도, 나도 걱정이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개학 첫날 학교에 갔을 때 아이의 서류는 넘어왔지만 전산상으로는 전학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아 반배정도 되어있지 않은 것이었다. 낯선 곳에서 생긴 일이었기에 난감했다. 학교 서무실에서 일하시는 분이 즉석에서 정해주신 반으로 갔더니 기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1학년 때 방과 후 ESL 수업을 해 주시던 2학년 선생님이 큰아이의 담임이 되신 것이었다. 이사를 하셔서 전근 신청을 하셨다 했다. 그리고 1학년 때 ESL선생님도 같은 학교로 업무지가 바뀌신 것이다.

두 선생님의 큰 아이 사랑은 유별나셨다. 낯선 환경이지만 친숙한 선생님들 덕분에 새 학교에 금세 적응했을 뿐 아니라 영어 실력도 쑥쑥 늘어갔다. 담임 선생님은 큰아이가 매일 쓴 글짓기 작품을 ESL선생님과 공유해서 보시며 큰아이의 재능을 칭찬해 주시니 아이는 신이 나서 글도 쓰고 책도 읽었다. 반을 대표해서 글 쓰는 일도 아들에게 맡기고 친구들의 글쓰기를 도와주는 '조수'로 임명해 주셔서 아이가 자기 재능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음을 깨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 방학을 앞두고 십일 전쯤 내 건강이 나빠져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남편은 새벽에 회사를 나가야 해서 아이를 학교까지 라이드 해 줄 사람이 없었는데 ESL선생님께서 매일 출근 전 들러 아이를 데리고 가시고 당신이 퇴근하실 때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셨다. 그 기간 중에 큰 아이의 생일이 있었고 집에 올 무렵 아이의 손엔 레고 팽이 한 개와 엄마가 아파도 우울해하지 말고 밝게 지내줘서 고맙다는 내용의 카드 한 장이 들려있었다.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온몸에 긴장감이란 덧옷을 입고 사는 것이었다. 인천 공항 출국 심사대를 벗어남과 동시에 긴장감을 예열하고 미국 공항의 입국심사대 앞에 서는 순간 최고조로 높아진 긴장감은 영어를 쓰며 지내는 동안은 늘 같은 자리. 낯선 이들의 무심한 시선도 아프고 친절한 시선도 불편했다. 그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까 내가 혹 문화적인 결례를 범하진 않을까 무던히 신경 쓰고 애 끓이며 살았는데 선생님의 한없는 사랑에 그만 마음을 놓은 까닭이다.

방학이 되어 한국으로 가서 병원 치료를 받고 한 달 후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이는 무사히 2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학기 중엔 '내 아이 꽃처럼 봐주십사'부탁하는 것 같아서 간단하게 초콜릿이랑 카드만 선물했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과 ESL선생님께 용기 내서 여쭤봤다. "혹 괜찮으시다면 한식을 드셔 보시겠냐고, 학기 마지막 날 가족들과 함께 드실 한식을 준비해 보겠다고." 두 분의 대답은 "YES!!!"


학기의 마지막 날, 오전 부터 나의 온 마음과 실력을 다해 식사를 준비했다. 메인 고기는 두 종류로 준비를 했다. 종잇장처럼 얇게 잘라 온(Paper cut) 돼지 목살의 핏물을 닦아내고 탄산수를 부어 누린내를 제거한 후 후추, 설탕, 간장, 마늘을 고기 두 줌 당 각 한 숟가락의 비율로 순서대로 넣고 고추장과 굵은 고춧가루를 색이 빨갛게 될 정도로 넣고 잘 주물러 재워놓는다. 쇠고기는 간장 양념으로 준비해 볶아둔다. 샐러드를 따로 준비할 것이기에 다른 채소는 넣지 않고 오로지 고기만 따로 볶아 담았다.

사이드로는 삼색전을 준비했다. 붉은색 김치전은 신김치를 종종 썰고 같은 분량의 양파도 곱게 다진다. 양파와 신김치를 합친 분량만큼의 기름 뺀 참치를 넣고 튀김가루(시간이 지나도 부침이 늘어지지 않아 미리 준비해야 할 때 사용하면 좋다)를 섞어 되직하게 반죽한 뒤 한 숟가락씩 떼어내 부침을 만든다. 초록색 호박전은 호박 한 개는 곱게 채 썰고 한 개는 믹서기에 갈아 반죽 물을 만든다. 여기에 튀김가루를 섞어 한 숟가락씩 지져낸다. 채 썬 호박이 곱게 초록빛을 내고 쫀득하며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다. 마지막으로 크림색은 감자전을 준비한다. 성글고 거친 강판에 감자를 갈아내고 잠시 가라앉혀 웃물을 따라낸 후 소금으로만 간하여 전을 부친다.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좋다. 양조간장과 식초를 2:1 비율로 섞어 곱게 채친 양파와 세라노 고추를 넣은 양념장을 곁들였다. 그리고 백미밥을 식구들 먹을 분량만큼 넉넉히 담았다.


학교의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아이를 데리러 갔고 그때 조용히 한식 도시락을 선생님들께 전달했다. 도시락을 건네는 나는 감사한 기억들에 울고 받는 그들은 내 마음을 다독여 주느라 울었다.우리 앞에는 큰 이별을 앞두기도 했었다.


큰아이가 2학년을 마치고 우리는 멕시코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도 선생님들께 해해년년 신세를 졌다. 둘째까지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해마다 아이들이 성장해갔고 학년의 마지막 날엔 언제나 감사의 도시락을 선물했다. 멕시코에서 삼 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음 해 담임선생님들은 한식 도시락을 기다리셨노라고 웃으며 말씀해 주시기도 했다. 올해는 봄방학 때부터 쭈욱 재택수업을 한 까닭에 아이의 아쉬움도 컸는데 학용품을 찾으러 간 날, 핑크색 플라멩고 튜브를 허리에 두른 채 나타난 둘째의 담임선생님, 차 창으로 선생님은 학용품을 건네주시고 나는 말없이 도시락을 건넸다. 우리 아이가 선생님 덕분에 미국에서의 첫 일 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내 온 마음의 감사를 함께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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