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을 조작하다

요리는 과학, 부엌은 실험실.

by 후디리

멕시코로 이사한 후 한 달 정도 늦게 도착한 짐을 푸느라 상자 지옥에 빠져 있을 때 '딩동', 벨이 울렸다. 눈이 동그랗고 큰 아이와 엄마가 서있었다.

중국어 억양이 밴 영어로 "옆집이에요.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라며 손에 무 떡(Daikon mochi) 한 덩어리를 건넸다. "잘라서 기름에 구워 먹어 봐요"라는 말도 건너왔다. 이완 언니와의 첫 만남이다.


이날 이후 언니는 늘 먹거리를 물어다 주는 엄마 제비 같았다. "후디리, 타이완식 만두야. 먹어봐", "후디리, 청경채, 유채, 겨자, 꽃부추 먹을래?", "후디리, 코코 갔더니 맛있는 과자 들어왔더라.", "후디리, 대만식 족발 만들었어. 양이 적어서 한쪽만 가져왔어. 맛만 봐" 이런 식이였다.


하루는 "후디리, 내 것 사는 김에 네 것도 샀어. 요리해서 먹어봐"라며 팩 하나를 주는데 정체를 확인하고 기겁을 했다. 유치원 다녀도 될 듯한 나이의 돼지머리 반쪽이였다.

"이걸 어떻게 먹어요?"

"난 그냥 삶아먹어. 귀는 오돌오돌하고 코는 쫀득하고. 맛있는데 안 먹어봤어?"

"먹어는 봤는데 음식을 만들지는 않아서요. 손질은 어떻게 해요?"

"난 칼로 살을 다 발라내서 사용해. 암튼 수고".

핵폭탄을 던져놓고 언니는 유유히 사라졌다.


냉동실에 얼른 돼지머리를 넣어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는 너튜브, 네이분 등에서 머릿고기 만들기, 편육 만들기 등의 검색어로 학습에 들어갔다. 면도, 세척, 삶기, 살 발라내서 누름틀에 넣기 정도로 과정을 요약할 수 있었다.


배운 대로 통째로 솥에 삶으려니 돼지 이빨을 닦아줘야 하나 어째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어디 물을 데도 없었다. 이완 언니 말대로 살을 먼저 발라내는 게 좋을 듯했다. 이후엔 된장 물에 살짝 삶아 잡내를 제거하고 쑤욱 삐져나온 털들은 일회용 면도기로 제거했다. 삶는 시간을 줄이려고 얇게 채를 썰어 마늘, 양파, 대파, 후추 등의 향신채와 술, 간장 조금 넣고 물을 자작하게 부어 중약불에서 뭉근히 끓였다. 물을 적게 잡은 것은 살만 건질 것이 아니라 삶은 물까지 다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껍질이 흐물흐물 해질 때 뚜껑 달린 유리그릇에 봉긋하게 올라오도록 넘치게 담은 후 뚜껑을 닫았다. 누름틀이 없으니 제살의 무게와 압력으로 누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성공적.

고기를 채 썰어 만든 까닭에 단면이 예뻤다.

마늘 겨자 소스에 채소들과 함께 버무려 냉채로도 활용할 수 있다.


보쌈, 수육은 덩어리 고기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누름 고기, 머릿고기, 편육으로 불리는 음식은 외국에서 구하기 쉽지 않았다. 헌데 이 어려운 걸 해내다니 뿌듯했다. 이후로도 수시로 머릿고기를 만들어 이완 언니네랑 나눠도 먹고 선물도 하고 그랬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보니 돼지머리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큰 족으로 하면 살이 많아 퍽퍽해서 쫀득하고 탱글한 편육의 매력이 사라져 미니족으로 만들어 보았더니 들인 품에 비해 양이 너무 적게 나왔다.


한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식탐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외국살이를 하며 숱하게 경험했던 까닭이다. 껍질의 젤라틴이 탱글 거림을, 연골의 오도독함이 식감을, 볼살 등의 살이 구수한 맛을 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돼지껍질, 돼지 귀, 돼지고기를 섞으면 머릿고기맛이 날 수 있겠다 싶었다.

돼지껍질과 귀는 된장과 향신채를 넣고 살짝 삶아낸다. 귀와 껍질의 털은 면도기로 밀어 정리하고 채를 썬다. 목살은 핏물을 빼고 숭덩숭덩 썰어놓는다.

준비한 재료들에 양파가루, 마늘가루, 소금, 맛술을 넣고 물은 재료보다 조금 덜 넣고 전기 압력솥에 25분 돌린다. 불 조절할 필요가 없어 전기솥이 편할 때가 있다. 압력을 빼고 다시 볶음(saute) 기능으로 20분 정도 물기를 졸였다.

사각 용기에 담아 한 김을 빼고 완전히 식힌 후 냉장실에 넣는다. 돼지껍질을 넉넉히 넣어 젤라틴이 풍부할 것이라 생각돼서 뚜껑 없는 그릇에 대충 담았다. 결과는? 성공적.

양파가루와 마늘가루를 많이 넣어 라면스프 맛이 난다는 딸의 평가는 흘려듣고 맛있다는 남편의 말만 새겨들었다.


냉동실에 그득 쌓아둔 편육 덩어리들을 보며 그 맛을 재현해 낸 나의 식욕, 만들고자 하는 의욕, 지치지 않는 도전의식과 지구력에 무한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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