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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쫑 Jan 06. 2023

우울하지 않았던 퇴직, 그러나 곧 현타

퇴직 후 보낸 5년의 시간들

     퇴직을 앞두고 사무실 출근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30년 회사 생활을 통해 노후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했으나 매일 놀고먹으며 여행이나 다녀야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너무 이른 나이고 가진 돈을 쓰며 놀 배짱도 없기 때문이다. 퇴직 전 아내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나는 우리가 가진 재산이 얼만지 노후에 필요한 돈은 얼만지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봤다. 재산이라 봐야 아파트 한 채요 아내가 알뜰히 모은 예금이 전부. 국민연금 수령까지는 아직도 5년이 남았다. 그나마 퇴직금을 일정기간 퇴직연금으로 수령하고 거기다 쥐꼬리 예금이자를 더해 적정생활비 수준의 수입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국민연금연구원이 2020년 조사한 은퇴 후 부부 적정생활비는 267만 원이다). 먹고 산다는 게 복잡한 뜻을 함유하고 있지만 나의 노후생활 준비는 분명 풍족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평소 통장에 있던 돈을 노후의 위안거리로 삼곤 했는데 이것도 두 아이의 결혼 자금으로 좀 보태주기로 하고 또 우리 아픈 때를 대비하여 그대로 두기로 하니 행복한 노후를 위해 가용 가능한 돈이 아니었다.

    퇴직하면 원 없이 쉬어보자고 했던 나였지만 무료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한 달 정도 지나니 내가 기대했던 삶과 어긋나는 느낌이 들고 생각은 더 복잡해졌다. 퇴직자에게는 오랜 기간 일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도 있어 놀며 배만 채운다고 모든 게 만족스럽진 않다. 사회로부터 이탈된 자신을 다시 사회로 옮기려는 노력은 돈을 수반하고 있었다. 친구를 만나 식사한다든가 인적 네트워킹을 위해 어떤 모임에 참여한다든가 무엇을 새롭게 배운다든가. 어느덧 내 생각의 끝은 결국 돈과 연결되는 구조로 변해 가고 있었다.


    현타. 현실자각타임. 생각이 많으니 잠도 줄었다. 매일 아침 컴퓨터를 켜고 이것저것 뒤진다. 아내는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하지만 머리는 오만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의 꿈은 뭐였나, 10년 뒤 나의 모습은 어떨까, 월급이 없는 것에 대한 불안감… …. 결국 문제는 돈이며 돈과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30년이었다. 하루종일 무의미하게 시간을 때우는 그런 노후는 경제적인 문제도 있지만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진다. 어찌 보면 돈벌이보다 노후에 뭔가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앞으로 나에게 발생할 여러 상황들을.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쓰는 거, 적게 벌고 있는 돈과 함께 적당히 쓰는 거, 못 벌고 있는 돈으로 생활하는 거, 못 버니깐 불안한 미래를 생각하며 아껴 쓰는 거. 첫 번째가 가고 싶은 길이지만 퇴직한 지금의 상황에선 불가능에 가깝다. 세 번째 네 번째는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세 번째는 미래 가정경제 파탄이요 네 번째는 먹고사는 문제에만 급급한 극빈층의 삶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함께 노후 포트폴리오를 짜며 점검했었지만 매달 지출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숫자들이 요즘엔 대문짝만 한 크기로 보인다. 각종 세금 및 보험료,관리비 … …. 매달 지출해야 하는 고정 지출 내역을 보며 나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나는 현실을 인식한 현타 퇴직자가 되었다.


    창고에 처박혀 있던 배낭을 꺼냈다(퇴직 후 나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는 국토종횡단 1,000km를 혼자 걷는 것이었다). 이것저것 잴 것도 없다 바로 떠나자. 걸으며 생각하자. 평소 마라톤으로 단련된 체력이기에 하루 42km를 걷는 도전이 두렵지 않았다. 국토종횡단 1,000km를 24일간 걷기로 했다. 드넓은 대지를 가슴에 품고 걸으면 뭔가 답이 있으리라.  임진각~부산, 강화도~속초 일정별 코스와 계획을 정리하자 비로소 맘이 평온해졌다. 힘들게 걸어 몸이 녹초가 되었을 때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마라톤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어찌 보면 지난 5년의 시간은 국토종횡단 1,000km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24일간 내가 걸었던 국토종횡단의 시간은 내 인생 큰 전환점이 되었다. 걸으며 생각하고, 걸으며 고민하고 계획했던 시간들. 작은 텐트를 집 삼아 야외에서 자며 하루 50km 넘게 걸었던 날도 많았다. 그런 날일수록 나의 정신은 더 맑아졌다. 걸으며 비로소 나는 퇴직의 현실을 받아들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사 생활하며 무심했던 가정에 살가운 모습의 가장이 되자고 했다. 24일간 걸었던 시간을 원고로 쓰는데 3개월이 걸렸다.  '50대 청년 대한민국을 걷다'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나는 두 번째 버킷리스트, 코이카 해외봉사단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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