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딸과의 대화
2007. 06. 30
발신 : 아빠
수신 : 작은 딸
제목 : 1학기를 마치고
이슬아! 엊그제 떠나온 거 같은데 벌써 1학기가 끝났구나. 시간 진짜 빨리 간다. 이슬이도 좀 있으면 방학이지? 기말고사 준비도 힘들 테고. 아빠와 만날 날도 얼마 안 남았네. 아빠는 방학 때도 공부하면서 중국 시장조사도 하고 일을 많이 하려고 해. 이번 학기 중국어 공부하며 한국어과 학생들에게 한국어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아주 만족해서 아빠도 기분 좋아. 학교 측에서도 아빠를 좋은 교사라고 말하는 거 같아.ㅎㅎ
아빠가 곁에 있다면 이슬이랑도 재밌게 공부할 텐데... 그래도 이슬이가 혼자 잘해나가니 든든하구나 아빠는. 늘 열심히 하고 꾸준히 공부하면 좋은 결과 있단다. 조급하게 생각지 말고 네가 생각하고 있는 거처럼 공부해. 지금도 잘하고 있는 거야.
내일은 아빠가 아주 먼 곳으로 가. '이우'라는 도시인데 시장조사 하러 가려고 해. 중국에서 공부 마치면 다시 직장생활 해야지 아빠가. 중국을 배우는 기회야. 버스 타고 18시간인데 두렵진 않아. 미래를 준비하는데 힘들더라도 참아야지. 오후에 버스 타고 가면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더라고. 침대버스라니깐 자면서 가면 될 거 같아. 이틀 거기서 머물건데 한국인이 하는 민박집 전화로 예약했어. 하루 100위안. 너무 걱정하지 말어.
한 달 후면 만나니깐 베이징 공항으로 마중 나갈게. 여행할 곳이랑 짝퉁시장이랑 갈 곳 많이 조사해 놔. 아빠도 해 놀께. 한 달 뒤 이슬이 보고 아빠가 깜짝 놀라겠어 너무 이쁘게 잘 자랐을 테니깐. 아빠랑 만날 날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기말고사도 잘 보거라. 이슬이 파이팅!!!!!!
>> 중국의 대학에서 나는 두 가지 일을 했다. 중국어를 배우는 일과 함께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근무하면서 적지만 현지인 월급(한국에서의 월급에 비하면 월급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을 받았기에 집에서 돈을 가져가지 않고 그 돈에 최대한 맞춰 생활하려고 했다. 한국어 가르치는 일은 중등교사자격증 덕이 컸다. 아주 적은 월급을 쪼개 모아 여름방학 때 시장조사를 다녀왔다. 상하이와 이우. 이우는 그 당시 전 세계의 공장으로 불렸다. 생활용품에서부터 없는 게 없어 세계의 바이어들이 찾아왔다. 한국의 대기업 마트가 그즈음 그곳에서 아웃소싱을 막 시작하려던 시점이었다. 비행기는 엄두도 낼 수 없었기에 버스로 갔다. 하지만 침대버스라 편하게 자다가 가려던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오래된 버스는 매연이 차 안으로 올라왔고 에어컨이 거의 기능을 못해 찜통이었다. 특히 나는 맨 뒷좌석이라 차량 기계음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 당시 좌석번호는 없었다. 먼저 타는 사람이 임자였다. 중간에 쉰다고 서면 한 시간이 기본이었다. 차가 고장 나 갓길에 세워놓고 수리한다고 또 시간 보내고. 그때 난 중국을 진짜 알게 되었다. 태평한 승객들의 표정. 냄새나고 찌들어도 그러려니 하며 남을 의식하지 않는 자기중심사고. 문명과는 조금 달랐던 사람들의 태도 등. 18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고통스럽게 보낸 시간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한번도 빨지 않은 거 같은 새까만 이불은 덮을 수가 없었다. 토할 거 같은 차내의 냄새와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멀미가 나 토할 거 같았지만 이겨내야 한다며 고통을 견뎠던 길고도 긴 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돌아갈 때 나는 돈을 조금 더 쓰고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중국은 고속철도가 전국을 시속 200~300km로 달리고 있다. 고속도로도 잘 깔려 울퉁불퉁한 길은 없다. 빠르게 발전한 중국을 보며 옛날의 기억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PS : 100위안. 2007년 100위안은 만원? 정도였던 거 같다. 학교 근처의 식사 한 끼가 3~5위안 했고. 한국 기업이 밀려들어오며 돈자랑하던 시절이었다. 한국 돈의 가치가 그만큼 있었으니까. 그 당시 한국돈 만원이면 100위안으로 바꿨는데 지금은 2만 원이 필요하다. 한국 돈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졌다. 나는 그 당시 한국어를 가르치고 받은 적은 월급을 모아 베이징 여행에 쓰려고 아끼며 살았다. 학교에서는 1~2위안짜리 학생 식당을 이용했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아마도 꿈이라는 걸 잊지 않아서 그랬던 거 같다. 다행히 지금은 그렇게까지 살지 않아도 될 정도는 된다. 이후 상하이에서 근무할 때는 넉넉하게 살았다. 빠르게 성장한 중국의 이면에는 농민공(농촌에서 올라와 저임금으로 일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중국어)들의 피와 땀이 있다. 중국은 아직도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 지금 중국에 5위안짜리 식사는 거의 없다. 그때 먹었던 식사는 단지 추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