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메고 24일간 걸어 국토 1000km를 종횡단한 58살 청년 이야기
10일 차 2017. 6. 13. 김천시 남면 남북저수지-왜관읍-대구시 경북대학교 (46.9km)
어제는 여유였다. 오늘은 또 많이 걸어야한다 46.9km. 남은 5일 중 4일간을 조금씩 앞당겨 걸어 부산에서의 마지막 날은 마침의 여유를 즐기며 천천히, 짧게 걷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보니 다 가고 한 명의 낚시꾼만 보였다. 그는 어제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였다. 대단한 인내심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마도 그가 낚으려는 것은 물고기가 아닌 다른 뭔지도 모르겠다. 낚시꾼이 낚시를 나갈 때 월척을 꿈꾸듯이 우리는 늘 행운을 기다리며 산다. 우리 기억 속에는 행보다 불행의 기억이 더 많고 실제로 매일 힘든 일에 부딪히며 산다고 생각한다. 저기 낚시꾼은 빈 어망을 탓하지 않고 뭔가를 기다리고 있을게다. 순간 나의 욕망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떠날 짐을 챙기는데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그는 내가 뭘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나는 어젯밤 슬며시 왔다가 오늘 아침 슬며시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남북저수지 둑을 넘어 올라와 한적한 도로를 걸으며 10일 차 일정을 시작했다. 배낭엔 먹을 게 별로 없어 초코바와 사탕을 번갈아 입에 물며 단거로 우선 배를 채웠다. 먹을 물도 없는 저수지에서 취사도 그래서 아침은 가다가 적당한 곳 식당이 있으면 먹을 참이었다.
한적한 시골길, 이른 아침이라 가끔씩 지나가는 차들만 한두 대 보였다. 저 멀리 좌측에 산세가 험한 산이 보이고 그 산의 밑자락 산길을 끼고 걷는데 그 산은 바로 금오산이었다. 지경마을이라는 표지가 보이고 등산로 표시가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표지판이 나무숲에 가려져 있었다. 내가 걸으며 보니 한적해서 걷기는 좋으나 금오산 산행을 목적으로 여기까지 오기에는 교통이 불편해서 그런지 이곳 등산로는 사람이 많이 안 찾는 듯했다. 사람이 적고 문명과 떨어져 있는 곳이면 걷기엔 최적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오지를 일부러 더 찾아다니기도 한다. 산길을 돌아 기분 좋게 걷던 이 길은 얼마 못 걸어 칠곡대로와 합쳐졌다. 칠곡대로는 추풍령 옛 고갯길 옆 새로 난 도로이며 그 길이 김천으로 이어져영남대로라고 한 어제 걸었던 4번 국도를 말한다. 나는 어제 4번 국도의 넓고 황량한 길을 걷기에 지루하여 옆으로 빠져나와 구 길로 걷다가 지금 이곳에서 다시 4번 국도 칠곡대로와 만난 것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구 길은 없어졌기에 넓은 칠곡대로를 따라 왜관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칠곡대로는 경부선과 나란히 가고 있어 경부선 철로와 칠곡대로는 낙동강 왜관철교까지 병열 하여 달렸다.
약목역이라는 기차역이 보이고 맞은편에는 식당과 편의점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침 9시 반이니 아무것도 안 먹은 배는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한두 군데 있는 식당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편의점이 보여 들어갔다. 4일간 야영을 하며 샤워는 고사하고 시원하게 씻은 적도 없지만 이를 안 닦아 텁텁한 거는 참을 수가 없었다. 편의점 건물 화장실을 빌려 간단히 씻고 이를 닦았다. 오늘은 대구 시내의 사우나가 숙소니 오랜만에 목욕하는 저녁이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허기진 배는 채웠다. 요즘 편의점은 없는 게 없다. 도보 여행자들에게는 베이스캠프 같은 존재다. 24일간의 이번 도보여행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른 곳은 주유소와 편의점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었으니 나는 좀 빨리 걷어야 했다. 하루 46.9km는 정상적으로 걸으면 크게 무리 없는 거리지만 오전에 너무 여유 부리다 오후에 바삐 걷는다면 짧은 거리는 아니다. 그래서 나에게 오전, 오후의 시간, 거리 안배는 매우 중요했다.
왜관(倭馆). 한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왜 왜관을? 특별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아마도 지명에서 느껴지는 어떤 연상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려~조선시대에 왜인들이 낙동강을 거슬러 이곳까지 올라와서 장사도하고 때론 노략질도 하고 했다는데 그래서 그들이 살았던 동네에서 유래되었다는 이름 왜관, 지금 칠곡대로를 걸으며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느낌이다. 왜놈의 그 왜관으로. 서울에 한강이 있다면 경상도에는 낙동강이 있고 낙동강 시작점엔 왜관이 있다.
칠곡대로는 갓길도 넓어 걷기에도 편했다. 왜관으로 내려걷다 보니 어부골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고기 잡는 어부? 근데 근처에는 강은 안 보이고 마을도 길에서 우측으로 돌아 산자락 밑이었다. 궁금하기도 해서 일부러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마을 이름의 유래를 물어보려 했는데 마을에 사람이 없었다. 시골농촌의 낮은 대개가 그렇다. 집들이 문을 잠그진 않았는데 빈집을 막 뒤질 수도 없고 해서 몇 집을 헤매다 그냥 돌아 나왔다. 어제 지나친 부상리의 부상 쉼터 정자가 한글로 읽히니 우스꽝스러웠는데 어부골은 틀림없이 어부와 연관되어 있을 거 같았다. 좀 걸어 주유소에서 물을 얻으며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마침 어부골에 산다는 주유소 아저씨였다. 어부골 마을 초입에 예전엔 주막이 있었는데 어부골은 어부들이 낙동강에 고기 잡으러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오다가다 그 주막에서 막걸리도 한잔 하고 했단다. 그리고 어부골에서 왜관 낙동강까지는 3km가 채 안 되는 거리라고. 처음 와보는 내가 낙동강이 어디쯤 앞에 펼쳐질 줄 알아 어부골의 유래를 알겠는가? 낙동강이 어느덧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걸어왔던 칠곡대로를 직진하지 않고 좌측으로 꺾어지니 낙동강을 건너는 다리로 이어졌고 그 다리를 건너니 왜관읍. 무심코 다리를 건너며 보니 양쪽에 철교가 있는데 왼쪽은 열차가 지나가고 있고 오른쪽도 철교인 듯한데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나는 다리를 건너가서야 내가 걸어온 다리 양쪽에 놓여있는 철교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다리 건너 우측에 두 철교에 대한 역사가 상세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너오면서 본 오른쪽 철교는 1905년 일제가 만든 경부선 단선 철교로 현 호국의 다리며 왼쪽 철교는 왜관철교로서 1939년 경부선의 복선화에 따라 호국의 다리 50m 북쪽에 복선의 철교로 새로 만든 것이었다. 호국의 다리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후퇴하던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을 건너 왜관에 최후의 배수진을 치면서 그 해 8월 인민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폭파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나무로 임시 복구되어 사용해오다가 1993년 인도교로 복구되었으며 낙동강 전투를 기리기 위해 그때부터 호국의 다리로 명명되어졌다고 써져 있었다.
나는 낙동강을 건너 왜관 읍내에 닿자마자 다시 호국의 다리를 건너 낙동강을 또 건넜다. 일부러 호국의 다리를 왔다 갔다 걸어봤다. 전장 469m의 호국의 다리는 산보하기도 좋고 낙동강을 한눈에 바라다볼 수 있어 다리를 걷는다는 거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다. 호국의 다리 역사를 알고 건너니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호국의 다리 위에서 6.25 때 산화한 영령들에게 잠시 묵념을 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이유도 없이 죽어 갔을까? 피아의 구분 없이 이념의 혼란 속에서 전쟁의 도구로 나섰던 젊은 영령들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때 죽은 영령들이 국군이던 인민군이던 미군이던 다들 고귀한 생명인걸.
왜관읍은 역사만큼이나 읍의 규모도 꽤 컸다. 왜관읍의 반은 미군기지가 차지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왜관의 한쪽은 미군기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가 막연히 왜관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은 왜(倭)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그 어떤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왜관읍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일본의 냄새였다. 그 냄새가 당연히 몇 백 년 전 왜인들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생활했던 것과 연관되는 흔적은 아닐 거라고 예상은 했고 일제 강점기의 흔적은 남아 있겠지 하는 정도였다. 모르는 지역에 가서 뭘 찾고자 할 땐 택시기사에게 묻는 것이 최고. 지긋하신 택시 기사 하는 말, 몇 십 년 전만 해도 일본식 가옥들이 여럿 보였는데 지금은 읍내가 개발되면서 아파트도 많이 들어서고 다 없어졌단다. 그러면서 왜관초등학교 옆에 한두 개 남아 있다며 자기 택시를 타면 거기뿐만 아니라 왜관읍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소개시켜주겠다고 제의를 했다. 하도 친절하기에 나는 거의 택시를 탈 뻔했다. 돈을 요구할게 뻔한데 순간 택시 기사의 언변에 넘어갈 뻔했던 것이었다. 어차피 걷는 중이니 두 발로 걸어서 천천히 보겠다고 했더니 택시기사는 한건 놓쳤네 하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택시 기사의 말을 기억하고 2km 정도 걸으니 초등학교가 보였다. 읍 단위 초등학교 치고는 운동장도 넓고 꽤 커 보였다.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체육수업을 하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고 있었다. 왜관초등학교는 왜관의 역사만큼이나 전통이 있었다. 1915년 설립된 초등학교니 웬만한 읍내 사람들은 이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겠나 싶었다.
왜관읍에 하나 남았다는 일본식 가옥은 학교 운동장과 담벼락 하나로 붙어 있었다. 2층 집이었는데 2층은 분명 목재로 만든 일본식 가옥이었는데 1층은 벽돌로 보강했고 특히나 대문은 우리네 6,70년대 양옥의 대문이어서 집의 구조가 많이 변형된 듯했다. 이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이웃 주민들에게 물어봤는데 모두 관심이 없었다. 일본식 가옥 앞은 고층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고 집 마당에 우뚝 자란 오래된 나무들만이 이 집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했다. 그저 사람 사는 집이었다. 이게 왜(倭)의 냄새인가,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걸어왔나 싶어 순간 허탈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집은 본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지은 집인데 해방되고 왜관초등학교 교장관사로 사용되다가 오래전부턴 개인이 사서 산다고 한다. 이 집을 사게 된 연유가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는 없었다. 지금 왜관에 왜놈의 왜관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