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메고 24일간 걸어 국토 1000km를 종횡단한 58살 청년 이야기
11일 차 2017. 6. 14. 대구 경북대학교-경산시–경북 청도읍 (44.5km)
4일간 연속해서 야영을 했던 나에게 어제 사우나에서의 달콤한 휴식은 나의 몸을 어느 때보다도 가볍게 만들었다. 잠결에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잠을 못 이룰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나의 피곤함이 코 고는 소리를 이겨낸 거겠지.
아침에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배낭을 챙겨 나왔다. 근처 김밥 집에서 아침을 먹고 김밥 두 줄을 샀다. 김밥은 점심때 먹을 곳이 마땅치 않을 때나 출출할 때 걸으며 간식처럼 먹기에 딱 좋다.
나는 경산시을 거쳐 청도로 갈 계획인데 좀 더 확실히 길을 확인해보자는 생각으로 김밥집 앞 버스정류장의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두세 사람 모두 얘기하는 방향이 제각각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걸어간다 했더니 그 뒤부턴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내가 알아서 가기로 하고 지도를 보며 걷기 시작했다. 대전 시내를 빠져나와 옥천 갈 때도 이랬다. 그래서 대구 같은 큰 도시는 벗어날 땐 헤매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동대구역을 지나는데 출근길이라 그런지 사방에 차들이 꽉 막혀 있었다. 출근전쟁은 대도시면 어김없었다.
나는 큰길을 벗어나 금호강 쪽의 길로 들어섰다. 나무숲으로 가려져 금호강변은 안 보이고 왕복 2차선 좁은 길에는 차량이 뜸했다. 동대구역에서 얼마 안 걸었고 여기도 대구일 텐데 길이 너무 한적했다. 길을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걸은 지 얼마 안 되었기에 계속 앞으로 걸었다. 눈앞에 조그만 고개가 보였다. 좌측 기찻길 옆 담벼락에 비 내리는 고모령이라고 쓰여 있었다. 고개라고 보기에도 그렇고 그런 언덕 수준의 고개였다. 고모령은 유행가 노래 가사로 유명한데 괜히 이 고개를 넘는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노래와는 어울리지 않는 언덕길이었다.
사실 고모령의 전설은 유행가 노래 가사와는 좀 차이가 있다. 그중 하나의 전설이 옛날 고모령에 홀어머니와 어린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덕을 쌓으며 우애도 쌓아야 할 남매가 서로 시샘하며 싸우는 모습에 실망한 어머니가 자식을 잘못 키웠단 죄스러움에 집을 나와 걷던 길이 지금의 고모령 길이고, 이 고개 정상에서 집을 뒤돌아 본 것이 ‘어머니가 뒤돌아봤다’고 해서 고모령(顧母嶺)이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나는 바닷가 마을에서 살았다. 50여 년 전에 우리네 삶이 다들 그랬다 하지마는 그 당시 바다는 특히 우리에게 넉넉한 삶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바닷가 마을은 다들 사는 게 힘들다 보니 집집마다 곡절이 많았다. 나의 고향 친구 영수. 이웃하여 살던 친구다. 파도가 크게 치던 어느 날 영수 아버지는 영수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배를 띄웠다가 세상을 등졌다. 태풍이 몇 일째 계속되어서 먹을 게 궁하니 어쩔 수 없이 파도가 잠잠한 틈을 타 바다로 나갔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 후 영수 어머니는 혼자서 5남매 자식을 책임져야 했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가장을 먼저 떠나보내고 여자 혼자 몸으로 5남매를 키우는 일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린 5남매의 생계는 오로지 영수 어머니의 몫이었다. 영수 어머니는 새벽부터 들에 나가 일도 하고 오후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고기잡이배를 청소하거나 그물을 손질해 주면서 품삯을 받곤 했다.
그 당시 영수 어머니의 나이가 40살이 채 안되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린 나이였다. 영수 어머니는 본디 심성이 착하여 먼저 간 남편을 원망하진 않았다. 그저 업보거니 생각하며 어린 5남매를 키웠다. 하지만 가끔 자신을 생각하면 앞이 막막했던지 어떤 땐 부엌에서 넋을 놓고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있곤 했다. 아무리 내색을 안 한다 하더라도 영수 어머니가 왜 아니 힘들었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영수 어머니는 영수를 불러 막걸리 심부름을 시켰다. 그럼 영수는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를 들고 날 찾아와 같이 가자고 했다. 그 주전자는 영수 아버지가 평소 마시던 막걸리 주전자였다. 우리 둘은 언덕 너머 동네 구판장으로 달려갔다. 주전부리로 사탕 하나씩 사먹고 재미 때문이었다. 막걸리 심부름을 마치고 집 앞마당에서 놀다 보면 부엌문틈 사이로 영수 어머님의 읊조리는 노랫소리가 들리곤 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올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비 내리는 고모령. 그 당시 나는 노래 가사를 알 턱이 없는 대 여섯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이 노래가 무척이나 슬프게 들렸다. 나는 지금도 길거리를 가다가 이 노랫소리가 들리면 그 당시 부엌에 멍하니 앉아 있던 영수 어머니의 슬픈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고모령을 지나 경산시로 접어들었다. 대구월드컵 경기장을 멀리 앞에 두고 좌측으로 돌면서 경산시를 지나기 시작했다. 우측의 경부고속도로를 끼고 있는 노변동을 지나 계속 걸으면 25번 국도로 접어들게 되고 그 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오늘의 목적지 청도읍에 도착하게 된다.
25번 국도는 왕복 4차선으로 넓고 차량은 뜸해서 오히려 걷기에 쓸쓸할 정도였다. 경산시에서 청도읍 가는 25번 도로는 가로수 하나 없는 뻥 뚫린 시멘트 포장길이었다. 시야가 트여 좋다고는 하지만 한낮의 더위와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느껴지는 삭막함이 마치 황량한 사막 위를 혼자 걷는 기분이었다.
먹는 물도 떨어져 가는데 주유소나 가게도 없고 해서 나는 경산시 남천면 대명리에서 25번 국도를 벗어나 남천면사무소 방향으로 틀어 구 길로 걸어 들어갔다. 좀 돌아가는 거지만 한낮 내리쬐는 태양을 그대로 받으며 넓은 길을 걷는 것보다는 걷기는 훨씬 좋았다. 남천면사무소 인근의 가게에서 생수와 빵을 사서 배낭에 넣었다. 한참을 걸으니 중앙고속도로가 위로 지나가고 고속도로 다리 밑 널찍한 평상에 할머니들이 쉬고 있었다. 어디나 다리 밑은 더위를 피하고 쉬기 좋은 피서지다. 할머니들은 여기가 자기들의 경로당이라며 나보고 쉬어가길 권했다. 배낭을 풀고 앉는데 한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시방 걸어서 다니는감?”
“네~”
“이 더위에 왜 걷남? 참 할 일도 없지 원. 쯧쯧”
난 할 말을 잃었다. 화제를 돌리려고 내가 물었다.
“할아버지들은 어디 계시고 할머니들만 있어요?”
“영감들 다들 일찍 하늘나라로 가부렀제”
“적적하지 않으세요?”
“아이구 뭐가 적적혀. 혼자 사니깐 세상 편허구 좋은디”
동네에 50가구 정도 사는데 할아버지는 한 분뿐이란다. 남정네들 젊어서 노름하고 술 먹고 속만 지질히 썩여서들 일찍들 갔다는데 그래도 살아 계시는 게 낫지 않냐 했더니 절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들도 산송장이라며 자려고 누우면 온 데가 쑤셔서 잠을 잘 수 없다며 영감 따라 빨리 가야지 하는 것이었다. 여든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할머니들인데 시골에서 평생을 죽어라 고생한 대가로 노년에는 잠자리마저 편하지 못하니 할머니들의 마지막 삶이 애잔하게 느껴져서 코끝이 찡했다. 할머니들에게는 아름다운 노후, 그런 사치스러운 말보다는 하룻밤만이라도 아프지 않고 편히 자봤으면 하는 게 꿈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모두 이렇게 고생을 고생이라고 생각지 않고 사셨나 보다. 할머니들을 보며 고모령에서 봤던 영수 어머니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