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쫑 Nov 19. 2017

上海에서 달렸던 시간들

달리면서 만나는 문화

    얼마전까지 내가 근무했던 상하이의 겨울 날씨는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눈도 내리지 않는다. 반면에 여름에는 40도를 육박하는 습한 더위로 사람을 지치게 한다. 상하이는 위도 상 제주도보다도  아래에 위치하고 있기에 추운 도시라기보다는 더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겨울이 춥지 않은 건 아니다. 습하게 추운 상하이 겨울 날씨는 어슬어슬하게 춥다는 말에 딱 어울리게 뼈 속으로 스며드는 추위라 중국 동북지방 -30~-40도 추위에 익숙한 사람들도 상하이에 오면 습한 추위에 놀라곤 한다. 그래서 그냥 온도만 보고 옷을 얇게 입었다가는 감기 걸리기 딱 좋다.

상하이

   겨울 상하이에서 달렸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가장 큰 차이는 “빨리빨리”와 “만만디”(慢慢地 - 천천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중국 사람들에게 있어 뛴다는 건 별종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실제로 중국에서 취미로 뛰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는 않다. 그나마 최근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레저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상하이는 글로벌 도시다 보니 아파트나 도로, 공원 등이 잘 조성되어 있어 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달리기 매니아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상하이에서도 겨울에 뛰는 사람을 만나긴 쉽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대단지 아파트임에도 겨울에 뛰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내가 상하이 살며 느낀 중국 사람들은 대개 성격이 느긋하고 명분이 있어야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겨울에 뛴다는 건 그들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나를 이해해준 사람은 아파트 보안(우리나라로 치면 “경비”) 孟선생이었다. 대개 보안이 경비를 위해 머무르는 곳은 아파트 입구 밖 한쪽의 자그마한 공간으로 추운 겨울에는 그들은 그 안에 작은 히터를 켜놓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이 보안이지 그저 그 안에서 눈만 멀뚱멀뚱 뜨고 드나드는 아파트 주민을 쳐다볼 뿐이었다. 孟선생은 合肥省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도시인 상하이로 돈 벌러 온 40대 중반의 전형적인 생계형 근로자였다.

    봄, 가을에는 아파트 단지에 뛰는 사람들이 여럿 있기에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만 나를 알고 있던 孟선생은 한겨울에도 뛰러 나오는 나를 처음에는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시골 출신의 맘 착한 그는 한겨울에도 뛰는 나를 보며 또 뛰냐며 말을 걸기 시작했고 우리는 점점 친해져서 서로 농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친해진 그에게 나는 가끔씩 한국상품 파는 마트에서 장을 보며 한국 과자나 빵을 사다 주었고 그는 자기 고향에서 나는 과일이라며 챙겨 가져온 과일을 나에게 주곤 했다. 추운 날에는 자기가 입고 있는 두툼한 방한 돕바 유니폼을 벗어주는 시늉을 하기도 하며 내가 뛰는 동안에는 보안실(경비실) 작은 공간에서 재밌다는 듯이 뛰는 나를 쳐다보며 한 바퀴 돌 때마다 내가 몇 바퀴 뛰었다고 손가락으로 알려주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러다가 내가 대여섯 바퀴 돌면 보안실을 나와 자기가 먹는 보온통의 따뜻한 물을 건네주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사계절 내내 자기만의 물통을 가지고 다닌다).

중국 보안의 겨울 복장

    나는 아파트 단지를 뛰게 되면서 孟선생과는 더욱 가깝게 되었다. 중국 보안의 복장은 얼핏 보면 우리나라 경찰복 비슷해서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경찰로 오인하기도 한다. 내가 처음 중국에 발을 디뎠을 때 친한 중국인 친구가 보안을 보고 경찰이니 조심하라는 농담을 했을 정도다. 하지만 孟선생은 딱딱한 격식의 그 제복이 거추장스러운지 윗 단추를 한두 개 풀어 얼핏 보면 불량스럽게 옷을 입었다. 나는 그 옷차림이 오히려 더 정겹게 느껴졌다. 이국땅에서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순수를 그에게서 봤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집안의 얘기며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상하이에서 어렵게 사는 자기 형편 등을 스스럼없이 나에게 얘기해주었다. 그건 불평이 아니라 살아가는 얘기였다. 孟선생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나는 내가 너무나 많이 가졌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孟선생과 얘기할 땐 나의 탐욕이나 과욕이 부끄러웠다. 나는 그에 비해 좀 더 가졌을지는 모르지만 삶의 만족도에서는 그에게 한참을 못 미쳤다. 孟선생은 늘 웃는 모습이었고 낙천적이었다. 내가 한겨울에도 지치지 않고 뛸 수 있었던 것은 孟선생이 맘으로 같이 뛰어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회사 업무로 힘없이 퇴근할 때면 그는 나를 보고 요즘 힘드냐며 짜요(加油 - 파이팅)하고 외쳐 주었다. 그런 날은 나는 저녁을 먹기 전 또 뛰면서 사무실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저녁을 시작하였다. 나는 회사 업무 스트레스를 집에 돌아와서는 새로운 분위기로 전환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이 뛰는 것이었다. 孟선생의 짜요라는 소리가 나보고 뛰라고 얘기하는 듯 하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상하이의 한 겨울에도 뛰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나는 孟선생을 통해 중국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뛰는 걸 통해 업무의 긴장을 해소하며, 참신한 머리를 유지하는 지혜를 얻었다.     

    나는 孟선생 덕분에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도 꽤나 얼굴이 알려지게 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내가 점점 뛰는 거리가 늘어나다 보니 많이 뛸 때는 아파트 단지를 열대섯 바퀴를 뛰기도 했다. 그러면 나와 친해진 孟선생은 내가 뛴 거리를 엄지를 치켜세우며 아파트 사람들에게 얘기하곤 했다. 아파트 주민끼리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얼굴이 익은 참에 그렇게 많이 뛰었다는 소릴 들은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오다가다 만나면 나를 아는 체 했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그들도 나중에는 孟선생 때문에 내가 한국인이란 걸 다 알게 되었다) 적은 나이도 아닌데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孟선생 덕분에 나는 나이에 비해 젊게 사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고, 혼자 사는 남자가 여자나 술은 멀리하고 건전하게 산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다보니 항상 행동거지를 스스로 살펴야 하는 불편함도 좀 있었지만 그런건 다 좋은거니 그럴수 있었다.   

    봄이 되면 상하이의 공원과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다시 붐비기 시작한다. 달리기에 있어서는 나에게 봄은 겨울과 똑같다. 좋은 날씨에 여러 사람들과 눈인사하며 뛴다는 게 겨울의 혼자일 때보다는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정도다. 그러다 불볕더위의 상하이 여름이 오면 나는 가끔은 민소매 상의마저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달리곤 했다. 한여름 거의 40도에 이르는 더위에 달리는 건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난 흠뻑 젖은 땀, 나를 향해 꽂아 내리는 더위를 즐기기라도 하듯이 달리곤 했다. 이때 다들 나를 미친 사람으로 봤지만 孟선생만큼은 여전히 나를 믿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응원해 주었다.

한 여름 상하이 황푸강변을 달리는 사람들

    이렇게 상하이의 겨울 봄 여름 가을은 나에게 달리면서 느끼는 사계절을 선사했고 그런 가운데 나는 회사 책임자로서 겪는 어려움을 하나씩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내가 상하이를 떠나 한국 본사로 복귀하던  날 선생은 나이에 맞지 않게 눈물을 글썽이며 따거 따거!!(大哥 - 중국에서 친형님 같이 따르는 사람에게 붙이는 칭호) 진짜 가는 거냐며 언제 다시 오냐고  붙잡았던 손을 한참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나는 중국 다른 곳에서도 달렸다. 중국 전역에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나는 출장이 많았다. 서쪽 먼 곳의 쓰촨성에서부터 북쪽의 하얼빈, 남쪽의 광저우 지역.. 대개 비행기로 서너 시간은 가야 했다. 나는 출장 때마다 운동화와 운동복을 챙겨가곤 했다. 출장지에서의 업무란 대개 중요한 상담이나 무슨 결정을 해야 하는 긴장의 2~3일이다. 출장지에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꼭 한간 정도를 뛰면서 이번 출장의 핵심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며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부여하곤 했다. 나 자신이 자신감을 갖는다는 건 협상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자신감은 비즈니스 협상 테이블에서 더더욱 빛을 발한다.  

    장쑤성 난징은 상하이와는 300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도시다. 난징은 우리에게는 중요한 거점시장이었다. 나는 난징에 자주 출장을 가면서 일부러 난징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백가호 주변의 호텔에 머물곤 했다. 이곳은 호수를 끼고 뛰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나는 난징 시내 중심가에서 떨어진 이곳 호텔에 투숙하며 아침, 저녁으로 호수 주변을 뛰었다. 아침에 뛰고 나서 전철로 난징 중심가로 이동하는 발걸음은 매우 가벼워 그날의 협상에 자신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뛰는 맘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경우에 나는 5km를 넘지 않는 거리를 30분 정도 뛰는 거로 신체와 두뇌를 결합시켰다. 나는 점점 상황에 따라 뛰는 감각을 조절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난징 백가호수

    상하이에서나, 난징에서나, 하얼빈에서나 나는 뛰면서 중국을 이해했고, 뛰면서 협상을 준비했고, 뛰면서 나의 미래를 꿈꿨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나는 점점 기록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록의 첫 도전을 2015년 가을 상하이 국제마라톤 하프코스 도전으로 잡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달리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