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 5시에 조용히 혼자 집을 나올 생각으로 다 꾸린 배낭을 현관 앞에 놓았다. 아내는 떠나는 전날까지도 내 나이가 젊은 나이도 아니고 또 어떤 날은 텐트 치고 밖에서 잔다고 하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냐며 또 한 번 일장 훈시를 하며 꼭 가야겠냐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만류하는데도 떠나야겠다고 우기는 내가 정말 잘 한 건지, 1,000km를 내가 24일 안에 완주할 수는 있는 건지, 중간에 힘들다고 포기라도 한다면 무슨 낯으로 아내를 볼 건지 등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니 영 잠이 안 왔다. 나는 뒤척이다가 잠든 아내를 보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아내가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얼 하러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고 했더니 첫날인데 아침을 든든히 먹고 가야 한다며 사람 여러 가지로 피곤하게 만든다고 또 한 번 핀잔을 준다. 지금은 그 소리가 핀잔이 아니라 잘 다녀오라는 소리로 들려 눈물이 핑 돌았다. 아침을 차리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니 결혼 27년간 고생만 시켰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일을 극구 하겠다고 하는 나 자신이 미워 보여 오늘은 아무 말도 않고 떠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차려준 된장찌개에 밥을 한 그릇 비운 후 나는 배낭을 메고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강변역에서 첫 전철은 05;40. 일요일 전철 플랫폼은 저쪽에 아주머니 한 분, 중간쯤에 노인 한 분만 있을 뿐 썰렁했다. 전철역 의자에 앉아 첫 전철을 기다리다 보니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왠지 모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첫 전철인데도 건대입구역을 지나면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탔다. 지금의 나는 전철을 탄 이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고, 오늘부터는 철저히 혼자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는 잡념을 떨쳐버리려고 오늘의 일정을 머릿속에 그리며 임진각에서 출발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시청 앞에서 문산 가는 좌석버스는 일요일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한참을 기다려야 왔다. 다행히 좌석버스는 평소보다는 훨씬 빨리 문산역에 도착했다. 문산역에서 임진각 가는 마을버스는 058번. 한 시간에 한 대 정도 다녔다. 40분 정도 또 기다려야 했다. 시간은 이미 아침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정류장에는 임진각으로 가기 위해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개가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었다. 배낭 차림의 나를 보고 한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국토종단해서 임진각에 온 거냐고. 임진각에서 오늘 출발한다고 했더니 언제 걸어 부산까지 가냐는 표정이다 (내 배낭 뒤에는 국토종단 임진각~부산역이라는 글씨가 써져있다).
문산에서 임진각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마을버스는 20여분 만에 임진각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자유의 다리로 걸어 들어가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아침 9시를 조금 넘긴 햇살은 따사롭게 비치고 하늘은 청명하여 마치 나를 임진각 여행 온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관광버스 여러 대가 연이어 도착하며 관광객을 쏟아냈다. 나는 그들과는 다른 사람임이 느껴져 왠지 관광객 무리들과는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바로 걸어서 아래쪽으로 내려가야 할 사람이었다. 옷차림과 여기 온 목적 모든 게 달랐다.
임진강에 걸쳐있는 자유의 다리는 잠시 멈춰서 있을 뿐 언젠가는 다시 올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유의 다리는 원래가 경의선(京義線) 철교로 상하행선 2개의 다리가 있었으나 6.25 당시 폭격으로 파괴되어 다리의 기둥만 남아 있었는데 전쟁포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서쪽 다리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임시 다리를 설치했고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만 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 귀환하였기에 이렇게 명명되었다.
자유의 다리
그 옆에는 자유의 다리를 수없이 건넜을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한 대가 1,020여 개의 총탄 자국과 휘어진 바퀴 그대로 참혹했던 6.25 전쟁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장단역 증기기관차
나는 집에서 임진각까지 오는 시간이 있었기에 이젠 서둘러 임진각을 출발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들었다. 나만의 출정식을 거행하기 위해 망배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많은 실향민들 분단의 한을 위로하기 위해 서있는 망배단에서 나의 결의를 다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묵념하고 돌아서려는데 저쪽에 할아버지 한분이 미동도 않고 계속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한참을 그리 서 있는 듯했다. 자세히 보니 마을버스정류장에서 나에게 말을 걸었던 그 할아버지였다.
그의 고향은 임진강 너머 바로 보이는 북쪽의 장단군. 여기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지만 갈 수 없어 고향이 그리울 땐 이렇게 임진각에 와서 살았는지도 죽었는지도 모를 누이를 그리워했다. 원래가 고아였던 그는 6.25 전쟁 나기 몇 달 전 38선을 넘었다. 먹을 게 궁했던 그 시절 38선이라고는 있었지만 맘만 먹으면 몰래 넘나들 수 있었기에 어른들을 따라 남으로 내려왔다가 38선 부근 미군부대 막사 주변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지냈다. 그때 그의 나이 8살. 미군 막사 주변에서 얻어먹고 지내는 거지만 먹는 게 해결되니 북에 있는 누이 생각은 잊고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맘만 먹으면 넘어왔던 38선도 몰래 다시 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기도 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끝난 후 어린 그는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혼자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남의 집 가게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기술을 익혀 독립하여 돈을 벌면 북에 두고 온 하나뿐인 누이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열심히 산 덕분에 돈도 벌고 결혼도 하여 5남매를 두었고 모두 출가시켰지만 그의 맘속에는 항상 북에 두고 온 누이가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누이의 생각은 더욱 간절했다. 자기는 이만큼 먹고살게 되었는데 북에서 고생했을 누이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는 날이 많아졌다. 나이가 들수록 그보다 7살 많은 누이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적십자사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지는 오래됐건만 그의 연령대로는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고 오래전부턴 이산가족 남북 간 교류도 끊어져서 상심한 그는 누이가 그리울 때면 이렇게 임진각 망배단을 찾아 북에 있는 누이를 불렀다.
“할아버지 누님은 아직 살아 계실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고맙소 젊은이. 근데 부산 까질 어떻게 걸어가우? 암튼 몸조심하고 다니소”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이 국토종단의 첫날이라 출발 시간이 좀 늦어질 거로 예상해서 목표거리를 31.2km 했다지만 너무 늦게 출발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와 작별하고 돌아서서 오늘 걸어갈 아래쪽 통일로를 보며 긴 호흡을 했다. 2017년 6월 4일 오전 10시 나는 분단의 한을 뼛속 깊이 들이마시며 임진각을 출발했다. 관광버스는 계속해서 임진각 광장에 사람들을 쏟아냈고 그들 형형색색의 유희가 출발하려는 나의 맘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 같기에 나는 빠른 걸음으로 임진각을 빠져나왔다.
임진각을 출발하는 필자
내가 오늘 걸을 길은 통일로. 통일로로 명명된 이 도로는 아래로 뻗을게 아니라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뻗어야 하는데 나는 지금 아래로 걷고 있다. 올해가 정전 65주년. 통일로 주변이 전쟁의 상흔은 없어졌다 하지만 백 년 천 년이 지난 들 전쟁의 아픔이 사라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