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메고 24일간 걸어 국토 1000km를 종횡단한 58살 청년 이야기
23일 차 2017. 7. 2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항–강원도 양양군 하조대해수욕장 (21.4km)
어제 80km 미친 도전의 성공으로 1,000km 국토종횡단의 9부 능선을 넘었다. 주문진항 사우나에서는 아침 9시까지 깊은 잠에 빠졌다. 성공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나를 아침 늦게까지 그냥 잠자게 놔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밖에는 세찬 비가 몰아치고 있었다. 남은 이틀은 날씨가 어떻든 문제없다. 남은 거리는 49km. 어제 80km를 뛰어서 해냈다는 사실에 1,000km가 성큼 다가와 있다고 생각하니 깊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세차게 몰아치는 비가 잠시 그치기를 기다리다 나는 오전 10시에 주문진항을 떠나 오늘의 목적지인 양양 하조대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아침은 주문진항 근처의 편의점에서 해결했다. 오늘 저녁에는 후배가 나를 맞으러 하조대해수욕장으로 올 거기에 점심도 간단히 해결할 생각이다. 주문진항에서 하조대해수욕장까지는 21.4km로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이 정도 거리는 22일간 내가 걸었던 거에 비춰 보면 눈감고 걸어도 될 정도의 거리였다.
어젯밤에는 밤 바닷가를 즐길 여유도 없었다. 너무 지치고 힘들었기에 밥집을 찾다 본 주문진항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주문진항을 떠나며 나는 항구 가까이서 걸어갔다. 잠시 그친 비 사이에 비친 주문진항의 바다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주문진항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주문진항은 보통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보이는 항구다. 나 어릴 적 살던 바닷가 마을 어머니, 아버지들의 모습이 주문진항에도 있었다.
어젯밤 너무 힘들고 피곤해서 그랬지 밤 10시 넘어 주문진항에 도착했을 때 내가 느낀 감동은 엄청났다. 주문진항에는 아직도 어제의 흥분이 남아있는 듯 했다. 그대로 두고 가자니 아쉬워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주문진 항구를 서성이고 있다. 시간이 오전 10시 반이 넘었고 언제 또 비가 또 쏟아질지 모르니 이제 그만 주문진항을 떠나야 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예보니 비 안 올 때 빨리 걷고, 비올 때는 비를 피해 쉬어야 한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려 빗속을 걸어야 한다면 21.4km도 쉽지는 않다. 가랑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보자기 배낭에서 우비를 꺼내 입었다. 보자기에는 핸드폰, 충전기, 보조배터리, 카드지갑이 있다.
나는 소돌바위 쪽으로 걸으면서 주문진항과 작별했다. 주문진항 바로 위가 소돌바위 해변이다. 마을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해안을 걷는다는 건 걸음걸음이 낭만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동해안을 걷는다. 아직은 큰비가 안 오니 나는 지금 동해안 길을 걸으며 낭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바다는 낭만도 있지만 꿈도 있다. 우리는 답답할 때 가끔 바다를 찾는다. 23일 차 내가 지금 걷고 있는 동해안 해안도로는 꿈을 만드는 중이었다. 58살 청년은 이렇게 꿈을 만들고 있었다.
나의 옷차림은 어제와 같지만 오늘내일 이틀은 뛰지 않아도 된다. 비가 와서도 그렇지만 천천히 걸어도 될 만큼 나는 이미 속초에 가까이 와 있기 때문이었다.
지경해수욕장을 지나 동해안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데 흩뿌리던 비는 세찬 비로 변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침 내가 걷고 있는 곳이 해안가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 비 피할 곳도 없어 나는 비를 맞으며 계속 걸었다. 배낭을 메고 이 비를 맞는 상상을 하니 아찔했다. 어제 아침 짐을 부치고 80km를 하루에 뛰어 남은 이틀간의 거리를 줄였던 나의 판단은 결국 옳은 결정이었다.
갈수록 빗줄기가 굵어져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라도 비를 피해야 했다. 해변가 소나무 숲에 정자가 하나 보였다. 나는 무작정 뛰어 정자로 올라갔다.
그곳엔 이미 4명의 나그네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친구 부부로 서울에서 당일로 이곳에 놀러 왔다가 피를 피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정자에서 가스불로 조개와 소라를 삶고 있었다. 비좁은 정자에 5명이 앉았으니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조개와 소라를 삶아 소주를 곁들이던 그들이 멀뚱히 앉아 있는 나에게 소주를 한잔 권했다. 소주는 정중히 거절하고 소라 몇 개에 뜨끈한 국물을 마셨다. 뜨끈한 국물이 뱃속의 창자를 타고 찌릿하게 내려왔다. 두 남자 중 한 명은 나와 동갑내기였다. “왜 이렇게 걷냐?“ ”하루에 얼마나 걷냐?“ ”잠은 어디서 자냐?“ 물어보는데 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그런 걸 뭘 묻냐고 핀잔주었다. 질문에 내가 답을 하지 않아도 된 게 다행이었다. 부부끼리 있는데 남모르는 객이 한 명 끼어있으니 그들도 여간 불편한 눈치가 아니었다. 내가 먼저 일어나야 했다. 나는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정자를 내려와 다시 걸었다. 비가 멈추진 않았지만 머쓱하게 그 자리에 있는 거 보단 나았다. 비는 좀 잦아들어 걸을 만은 했다.
동해안 해안도로를 걷다 보면 어느 곳은 도로가 폐쇄되어 해안을 멀리 돌아 안쪽으로 걸어가게끔 되어 있었다. 그런 곳은 대개가 해안가 철책이 드리워진 출입금지 지역이었다. 분단의 비극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에 동해안 북쪽 해안도로도 있었다. 국토횡단 둘째 날 김포한강어구에서 본 철책을 반대편 동해안 해변가에서도 보니 우리나라가 마치 거대한 철책 안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었다. 이 땅에서 철책이 사라질 날이 언제일지..
나는 동해안 해안도로를 걸어 북쪽으로 남애해변을 거쳐 광진해변, 죽도해변을 따라 계속 걸었다. 비는 계속 뿌렸고 운동화와 양말은 이미 젖어 물이 흥건했다. 하지만 오늘은 배낭 없이 걷는 거니 젖은 운동화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충분히 예상했던 비이기도 했다. 오늘 주문진항 출발은 많이 늦었다. 오전 10시 넘어 출발했으니까. 비를 피한다고 무조건 쉬다 보면 저녁 6시 전에 하조대해수욕장에 도착이 쉽지 않을 듯 했다. 그러니 웬만한 비에는 걸어야 했다. 1,000km 마지막 날은 나와 같이 걷고 싶다며 고향 후배 김태주 님이 하조대해수욕장에서 오늘 저녁 6시에 날 기다리기로 했다. 후배는 오늘 나와 함께 하조대해수욕장에서 하루를 묵을 예정이다. 23일간 나를 응원해 주고 24일 마지막 날은 나와 함께 걷겠다고 일부러 찾아와 준 후배가 고마울 따름이다.
기사문해변을 앞에 두고 38휴게소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 창가에 앉아 편의점 커피와 빵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편의점 의자에 앉아 창밖 동해안 해변가를 보며 쉬었다. 38휴게소라면 이곳이 한국전쟁 이전에는 38선 경계 지점이고 지금 걸어갈 위부터는 북쪽 땅이었다는 뜻. 첫날 임진각에서 만났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정말 살아생전에 북에 있는 누이를 만날 수 있을까..
임진각, 자유의 다리, 강화해변 철책, 동해안 철책, 그리고 휴전선. 아직도 우리는 곳곳에 분단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주문진항에서 여기 38휴게소까지는 17km. 하조대해수욕장까지는 4km 정도 남았다. 비를 피하며 천천히 걸은 것도 있지만 평소 걸은 거리의 반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라는 편안함이 있어서 그런지 걷는 기분이 마치 동해안 피서 온 느낌마저 들었다. 어제 80km 힘들었던 기억은 어느덧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허벅지의 근육통도 하루 만에 말끔히 사라졌다. 어제의 미친 도전은 결과적으로 지금 나를 편안하게 걷게 만들었다. 그래서 도전은 늘 그만한 가치가 있다.
오후에도 비는 계속 내렸지만 빗줄기가 더 이상 굵어지지는 않았다. 운동화와 옷은 젖었지만 덥지는 않아 걸을 만은 했다. 하조대해수욕장에 막 도착했다는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후배는 내일 단단히 걸을 채비를 하고 왔나 보다. 동해안에 왔으니 오늘 저녁은 회도 먹고 내일 걷기도 해야 하니 보신도 좀 해야겠다는 거 보니.
흐린 날씨였지만 하조대해수욕장 이정표는 선명히 보였다. 23일 차가 끝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끝났다는 성취감보다는 내일 하루 남았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하조대해수욕장에 도착하니 저녁 6시. 후배가 미리 예약한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얘기 나누다 보니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어제의 영웅담을 얘기하다가 머쓱해진 내가 저녁 먹으러 가자며 후배를 일으켜 세웠다.
일요일 저녁 하조대해수욕장 횟집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회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으니 오랜만에 먹는 소주라 그런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이제 다 끝났다’ 혼자 중얼거리는데 후배가 들었는지 ”내일 하루 더 남았잖아요? “ 하며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우리 둘은 소주 두병에 불콰해진 얼굴로 해변을 걸었다. 드디어 내일이 마지막. 언제 끝날까 하며 시작했던 23일 전 그날. 이제 하루 남았다. 내일은 이곳을 출발하여 속초항까지 27.5km를 후배와 함께 걷기로 했다.
마지막이란 늘 여운이 있다.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을 생각해 보았다.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니 그냥 웃음이 났다. 내일이 기다려졌다. 후배는 벌써 잠에 곯아떨어졌는지 코골이를 했다. 나는 그 소리가 정겨웠다. 23일간 나는 늘 혼자였다. 지금은 다른 한사람이 옆에 있다. 후배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잠을 청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곤지암, 추풍령, 낙동강, 부산역, 강화도, 양평, 횡성.. 나의 더듬이는 평창군 깊은 산골 폐교, 등매초등학교에서 잠이 들었다.
오늘 21.4km를 나는 빗속에 쉬며 걸으며 3.3km/1h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