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시엠립을 향해 6번 국도를 달리다
캄보디아에서 맞는 한국 설날 아침은 평온하다. 이곳의 설날은 "쫄츠남"이라고 하여 오늘이 아닌 4/14~4/16이다. 그러니 설날의 느낌은 없다. 해외에서의 명절 아침은 쓸쓸함이 있다. 외로움이 밀려들어 왠지 맘이 울적해지기도 한다. 이런 때는 달리는 게 답이다. 달리다 보면 쓸쓸하던 맘은 온데간데없고 활력으로 넘친다. 달리면서 다시 활력을 찾게 된다. 달리기는 약해지는 나의 정신을 강하게 만드는 명약이다. 내가 달리는 이유다.
아침 일찍 미역국에 썰은 가래떡을 넣고 미역 떡국을 끓였다. 한 달 전 시엠립 한국 마트에 가서 장을 보며 사 온 것이었다. 미역을 불린 후 참기름에 들들 볶으라는 아내의 말에 참기름도 잊지 않고 샀었다.
시엠립 가는 길은 6번 도로다. 캄보디아는 돈레삽 호수를 끼고 갈라져 5번, 6번의 두 개의 큰 도로가 있다. 5번 도로는 시엠립 돈레삽 호수 건너편의 바탐방을 지나는 도로다. 오늘 나는 서너 달에 한번 시엠립에 장을 보러 가느라고 익숙한 6번 길을 달리기로 했다. 음력으로 새해 첫날이니 하프코스 거리를 달리는 것도 괜찮겠고.
우리 가족 네 명 중에 두 명이 해외에서 명절을 맞는다. 작은 딸은 독일에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의 예술 세계를 더 넓히고자 힘들게 알바하며 공부하는 작은 딸에게 명절 축하 카톡 문자를 넣었다(독일과 캄보디아는 시차가 6시간이라 이곳의 아침은 독일의 한 밤중이다). 시소폰 시내의 중앙 도로를 1.5km 달리면 본격적으로 한적한 6번 도로가 된다. 한국은 설날이지만 이곳의 가게는 대부분 문을 열었다. 캄보디아는 전체 인구 1,650만 명 중 중국 화교 인구가 5% 정도 된다. 그들은 오래전에 이곳에 터를 잡고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요즘은 중국 자본이 물밀듯이 몰려오니 중국 냄새가 곳곳에 더하다. 중국 춘절 명절에 입는 옷을 의류잡화용품 가게 앞에 진열해 놓은 모습이 이채롭다.
요즘 캄보디아 자본의 대부분이 중국 자본이라면 승용차는 거의 다 일본 차량이다. 일본은 일찍이 해외 시장을 공략하며 원조와 경제를 연결했다. 캄보디아에는 일본의 무상원조로 지어진 학교나 교량, 도로 등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에 대한 인식도 호의적이다. 새 차는 닳아 못쓸 정도까지 고치고 또 고쳐 쓴다. 거기에 요즘은 한국에서 중고차(대부분이 승합차나 버스) 수입도 늘어 시내에는 중고차 수리점이 많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손재주가 좋은 건지 겉으로 보면 위험하다 싶을 정도의 차량도 잘도 달린다. 수리라는 게 차량을 거의 해체했다 다시 만드는 수준이다.
시내를 벗어날 즈음 시엠립 방향을 알리는 대형표지판이 보였다. 이곳을 지니면 마을이 없다. 10km 지점에 가게가 있는 작은 마을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그곳까지 달릴 계획이다.
시엠립 가는 6번 국도와 바탐방 가는 5번 국도 모두 프놈펜 가기 전 40km 지점에서 만난다. 그 뒤부터 한 길로 가서 그 길은 베트남 국경으로 연결된다. 반기에 한두 번 프놈펜에 갈 일이 있을 때는 버스로 5번 국도를 이용한다. 시엠립 6번 국도와는 100km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로 사정은 6번 도로가 훨씬 좋다. 아마도 시엠립의 앙코르 유적지 때문인 것 같다. 6번 도로는 갓길도 넉넉하고 포장도 잘 되어 있어 아침 뛰는 맛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길의 의미는 무엇인가?
길은 정직하다. 길을 달리면서 나는 솔직해진다. 숨이 가빠오고 온 몸에 땀이 범벅이 되면 가식은 없어진다. 오로지 뛰는 나만 존재할 뿐이다. 그때 나의 생각도 순수해진다. 나는 뛰면서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먹고살기 위해 직장 생활을 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들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달리다 보면 힘든 시절을 잘 견뎌준 아내에게 감사한 맘이 생기고 잘 자라준 두 딸들 모습도 보인다. 땀이 범벅이 돼도 그저 즐겁다. 신체의 한계는 정신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희망 가득한 두발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길거리 주유소에서 산 생수로 목을 축이고 계속 달렸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나의 맘속에 그려졌다. 캄보디아의 들녘은 한국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되게 광활하다. 시야가 탁 트인 곳을 끊임없이 달려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광활한 들녘은 평화다. 여기에 가식이 있을 수 없다. 숨이 가쁠수록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가식의 허울은 줄줄 흘러 없어져 버린다.
10km 지점에 이르니 작은 가게가 몇 개 보인다. 주민들도 몇 안 되는 아주 작은 마을인데 이채롭게도 드레스를 파는 곳이 있다. 가게 안에서는 아주머니 한분이 열심히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요즘 캄보디아 결혼의 허례허식은 가난한 젊은이들을 절망하게 만든다. 캄보디아는 결혼식 비용을 모두 남자가 부담한다. 축의금 또한 신부 측에서 다 가져간다. 대신 신랑은 여자 집에 들어가서 사는 전통인데 요즘 도시로 다들 나오니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결혼하고 사는지 신기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이혼하는 비율도 상당히 높다. 시소폰 이곳에서도 최근 결혼식 비용이 만 달러 정도 든다고 하는데 .. 한 달 월급이 300~400달러인데 이게 현실이다. 그래서 가끔 보는 결혼식 모습은 나에게 그다지 유쾌하게만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곳에서 1km 더 뛰기로 했다. 설날 아침의 기분이 상쾌하기도 하고 뻥 뚫린 들녘을 바라보며 달리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2월 초순 아침 캄보디아의 상쾌한 날씨까지도 더해 오늘 컨디션은 최상이다. 이 길은 끝없이 달려도 좌우에 아무것도 없다. 간간히 지나가는 차량 몇 대만이 보일 뿐이다. 나는 반환점에서 광활한 들녘을 쳐다보면 잠시 쉬었다.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느껴졌다. 설날, 새로움, 첫날, 희망, 꿈, 평화......
11km 지점에서 돌아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뛰는 발걸음은 여전히 가볍다. 뛰어 오며 봤던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듯 내 눈에서 왔다 사라졌다. 돌아가는 이 길은 시소폰을 거쳐 태국 국경의 도시 포이펫까지 이어졌다. 일본의 원조로 시행되는 사업의 내용을 설명하는 안내문을 보니 새삼 일본의 저력이 느껴진다. 얄밉지만 잘하기도 하는 일본이다.
내가 살고 있는 반티민쩨이주는 캄보디아에서도 소득이 낮은 수준에 속한다. 요즘 개발이 되고 있다지만 아직도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이 많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프놈펜과 달리 월급이나 일당이 아직도 형편없다. 뛰어가며 봤던 길가 공사장에 들렀다. 앳된 소녀가 험한 막노동을 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뭔 말을 하고 싶었다. 하루에 만 원도 안 되는 일당으로 뙤약볕에서 일하는 소녀는 열대여섯 살. 학교를 왜 안 다니는지는 물을 수 없었다. 나는 단지 그녀의 미소에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그녀가 신고 있는 헤진 슬리퍼는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거운 맘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갑자기 가족이 생각난다. 독일에 있는 작은 딸에게 힘내라는 말을 외치며 나는 다시 뛰었다. 한참을 달리니 저 멀리 내가 살고 있는 시소폰 시내 중심에 위치한 스와이 산이 보인다. 18km를 뛴 것이다. 이제 다 왔다. 상쾌함과 성취감이 어우러져 나의 두발은 더 빨리 내딛는다. 시내 중앙 공원에 닿았다.
설날 아침을 상쾌하게 맞이한 나는 혼자 기쁨을 만끽하며 공원 벤치에서 잠시 쉬었다. 그리고 근처 허름한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으로는 이른 시간이지만 어느덧 출출해진 뱃속에서는 뭔가를 달라고 한다. 볶음밥. 캄보디아 볶음밥은 종류도 많고 한 접시에 1,300원으로 값도 싸다. 고슬고슬하게 볶은 밥에 칠리소스를 살짝 뿌리고 먹으니 볶음밥 한 접시가 순식간에 없어졌다. 활기차게 연 설날 새 아침, 포만감에 행복함까지 더하니 내 맘은 어느덧 새해 희망으로 가득 찼다.
나는 설날 아침을 달리며 사랑하는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고 고마운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했다. 모든 이들의 새해 소원이 이뤄지길 바라며 나의 건강한 한 해를 꿈꾸며 달렸다. 달리기가 있기에 내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공원에는 결혼식을 앞둔 신혼부부가 사진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건 또 얼마짜리 결혼식일까? 누구에게나 시작은 설렘이 있다. 신랑 신부의 표정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