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새는 천장과 나의 욕심

by 허무

어찌어찌 한 편의 초고를 완성했다. 이제는 무한 퇴고의 과정이다.

그런데 또 다른 한 편이 문제다. 원하는 만큼의 스토리를 구상하지 못한 느낌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이 있다.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뜻이다.

나는 글쓰기에 있어 비슷하게도 ‘견생심(見生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멋진 작품을 읽고 나면 자꾸만 내 글에 녹여내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니 모범이 되는 작가들의 표현이나 문체를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게 되는 경우가 잦다. 건방진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영향들을 넘어서지 않으면 진짜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각오로 과감히 지워버린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내 역량이 아직 그만큼 미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윌리엄 포크너의 『곰』을 읽었다.

사실 나는 그가 어떤 작가인지,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는 사실조차도. 내게 포크너란, 영화 <버닝>에서 종수(유아인 분)가 “윌리엄 포크너요”라고 말하던 그 짧은 장면 하나로만 존재하던 이름이었다.


그냥 '읽어보기나 하자'는 심정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다 읽어버렸다. 멈추지도 않고, 단숨에. 5시간이 조금 안 걸렸는데, 책의 분량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린 편이었다. 읽는 내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고, 앞의 내용을 다시 돌아보며 확인해야 할 만큼 밀도 높은 독서였다.


정말 대단한 작가들과 읽어야 할 책은 많고, 그럴수록 나와 내 글을 점점 보잘것 없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포크너의 『곰』에서 내가 가장 놀라 점은,

짧은 글 안에 정말 다양한 층위의 개념들을 탑재되어 있고, 철학적이고 인류학적인 사유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포크너의 '다층적 스토리 구조''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서사'에 집착하게 되었다. 내가 쓰는 단편들에 적용해보려고 이리저리 시도를 해보았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될 리가.


포크너의 글에서 소재나 서사를 치환해서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글로써 강력한 힘을 가지지는 못할 것이다. 무수히 생각하고, 쓰고, 퇴고를 거듭하면서 온전히 내 안에 그 구조가 체득되어 있어야만 비로소 나의 '문체'로 드러나는 법이다.


은유나 비유를 하는데 있어서도 항상 신경이 쓰인다. 너무 흔하고 상투적이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누가 보더라도 형광펜으로 줄을 긋고 두고두고 돌아보며 기억할 법한 참신한 메타포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본 적 있는 인상적인 비유를 그대로 가져오게 되기도 한다. 금방 알아차리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은유와 비유에 대해서는 특히 신중하게 접근하려 한다.

그래서 내 기준은 :

"논리적으로 비약이 없고, 참신하고 독창적일 것"


짧은 단편 하나를 쓰는 것도, 나에겐 마치 빗줄기 사이를 요리조리 비집고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가들의 글을 보면 연신 감탄 밖에 나오질 않는다.

내 눈에는 장맛비내리는 들판처럼 비를 피할 공간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그들은 어떻게든 빗줄기 사이 협소한 틈을 찾아내고 비집고 들어가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것이 바로 작가의 힘인가 보다.


서울에는 며칠째 비가 왔다. 내가 사는 곳은 겉보기엔 멀쩡한 빌라 꼭대기층이다.

어제 설거지를 하다가 벗겨진 정수리에 '톡' 하고 물방울 떨어져서 고개를 들어 보니

천장 벽지 속에 빗물이 스며들어 마치 물집처럼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고, 그 틈새로 물방울이 맺혀서 떨어지고 있었다. 요즘 시대에 비가 새는 집이라니...


나는 비록 새어 들어온 그 빗물 한방울이

내 정수리에 떨어지는 것도 피하지 못했지만,

문학의 장맛비 속에서도 요리조리 빗줄기를 피해

나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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