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
하루키 라는 이름 위에 가로로 길게 작대기를 그었다. 책상 위에 책을 내려놓았다. 책의 옆면은 3분의 1정도만 조금 때가 탄 듯 어두운 색이었다.
담배갑과 라이터를 챙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차가운 공기에 헹궈진 햇빛에 눈이 부셨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탁,탁 튕겨 불을 당겼다. 눈이 사팔뜨기가 되도록 담배가 타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입술을 움직여 담배가 끄덕끄덕 거리기도 했다. 코와 이가 시렸다. 슬리퍼를 신은 맨발은 이미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재떨이로 쓰는 사기그릇에 나는 담배를 꾹 눌러 비벼댔다. 새카만 재와 남은 담뱃잎이 터져서 그릇안에 흐뜨러졌다. 오른손 검지와 엄지에 검댕이 일부 묻어 있었다. 난 양 손을 서로 비껴치며 탁탁 털어냈다. 그리곤 슬리퍼를 질질 끌고 집으로 내려갔다.
하루키는 이름에 작대기가 그어진 그대로였다. 집안 공기는 바뀌어 있었다. 네 시간마다 돌아가도록 타이머를 맞춰 둔 보일러 조작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분리수거를 위해 비닐을 꺼내 들고 식탁위의 빈 와인병 두 개와 와인과 함께 먹었던 치즈 포장 용기, 그리고 오래전부터 빈 채로 굴러다니는 플라스틱 생수병 몇 개를 주워담았다. 책상 쪽으로 눈길이 갔다. 하루키의 책을 집어들었다. 비닐봉지째 다용도실에 대충 말아서 던져놓고 문을 닫았다. 아직 보일러는 켜지지 않았다. 나는 고장난 것은 아닌지 보일러가 다시 돌아갈 때까진 지켜볼 것이다. 굳게 닫힌 창문 위로 외풍이 나를 희롱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