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는 모습은 형언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질 않는다.
개성을 찾기 시작했다. 작품에 자신감이 붙었다.
내가 만든 시나리오 <도너츠와 커피>는 40 여번 정도의 성형수술을 거쳤다. 크랭크인을 30일 정도 앞둔 지금도 계속 수정 중이지만, 이제 얼추 얼개가 갖춰졌다.
첫 시나리오와 지금 시나리오의 차이는 '현실성'에 있다. 이미 앞서 재정에 대한 얘기를 했기 때문에 굳이 '돈'과 관련된 얘기를 하진 않겠다. 여담이지만 영화 만든답시고 계속 돈 얘기를 하는 사람은 특별히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것 같기도 하다.
수정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 이유는 배우의 얼굴과 음색, 촬영장에서 느껴지는 기운, 배경음악이 주는 신비한 주문 등이 있다.
특히, 내게 있어서 음악이 주는 힘은 실로 엄청났다. 정해진 음악이 있기에 밀고 나가는 시퀀스가 존재할 정도다. 그 시퀀스는 도저히 정상인이라면 할 수 없는 맥락이다. 예를 들어 "밥 먹었어?", "네", "맛있었어?" 정도가 정상적인 대화 순서라면 나는 "밥 먹었어?", "네", "왜?" 정도의 맥락을 갖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영화를 직접 봐야 할 정도다.)
지난달, 제작팀에서도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말이 많았다. 조연출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충분히 공감했다. 그리고서 이 장면은 무조건 살리기로 결정했다. 촬영 전 모든 공정이 다 끝났을 때, 분명 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실어다 줄 것이라 장담했다.
그리고 나서 대략 한 달 정도가 지났다. 나는 배우들을 모시고 실제 그 말도 안 되는 시퀀스를 연습시켰다. 그러면서 점점 배우도 나도 모두 이 씬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배우는 연기의 입장에서 나는 카메라의 입장에서 궁금증을 가졌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고민을 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좋은 장면들이 나왔다. 그리고 오늘, 실제로 카메라 테스트를 해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이 시퀀스가 내 영화를 빛나게 해 줄 것이란 확신이 섰다.
돌이켜보면 무르익는 과정은 설명이 불가능한 것 같다. 내가 털북숭이 할아버지 정도가 아니면 얼토당토않는 말이기도 하다.
예전엔 무르익는 것이 눈에 보이는지 알았다. 무르익는 것은 결코 눈에 띄지 않더라. 취향과 색감 그리고 개성이 묻어나야 무르익더라. 그러다 시간이 흘러가면 자신만의 호흡을 찾는다. 가장 멋진 상태가 됐을 때 그 흐름을 느낀다. 그리고 나선, 특히 나 같은 경우엔 만족감을 느낀다. 개성을 찾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