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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나마나

The tempest

by 고로케


1. The tempest

: 문득 지하철에 앉아있다가 옛날 생각이 났다. 당장 오늘 있었던 일이나 고민이 아니라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난건 내 앞에 과잠을 입고 앉아서 낄낄거리던 대학생들 때문일까. 별생각없이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쳐서 시선을 피했다. 생각해보면 대학은 집에서 그닥 멀지 않아서 꽤 편하게 다녔다. 회사가 이렇게 멀어질 줄은 몰랐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내 머릿속은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작은 반항아 홀든 콜필드가 차지하게 됐는데, 갑자기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가 생각났다. 23살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는데 아직도 못 읽었다. 템페스트는 셰익스피어의 극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극이다. 그동안 그의 극들을 읽으면서 나는 단 한 번도 불완전하다고 못 느꼈는데 얼마나 대단한 극이길래? 조만간 책을 집어 들어야겠다.


2. 떡 도라야끼

: 3월 25일 오전 8시. 무거운 눈두덩을 치켜뜨고 한 시간 일찍 출근했는데 (누가 봐도) 어수선한 내 자리에 떡 도라야끼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떡 도라야끼.. 대체 누가..?' 8시면 이른 시간이다. 3층엔 나 외에 한 명 밖엔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 거렸는데 특이하게 도라야끼는 특정 몇몇 인물 자리에만 놓여있었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 살포시 놓아두고 퇴근한 걸까? 다정한 사람이네. 폭풍같은 한 주를 지나 정신을 차리니 금요일이었다. 그리고 곁을 보니 아직 뜯지 않은 다정한 떡 도라야끼가 놓여 있었다.


종종 팥죽 같은 얼굴을 하고 퇴근길에 1층에 내려가면 본인이 먹으려고 샀던 커피라면서 마치 1+1 행사처럼 냉장고에서 차가운 커피를 꺼내 건네주는 철파카가 생각나 연락을 했다. '톰, 떡 도라야끼를 좋아해?' 예상대로 철파카는 떡 도라야끼가 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팥을 좋아한다니 흔쾌히 주기로 마음먹었지만 6시 30분을 넘겨 내려가니 그는 퇴근하고 없었다. 다정한 떡 도라야끼는 내 입으로 들어갔다. 팥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대로 두고 가면 상할 것 같기도 했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를 생각하면서 이 커다란 도라야끼를 내 자리에 남겨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져서 한입에 욱여넣고 퇴근했다.


3. 이별

: 3월 29일. 동료가 퇴사했다. 섭섭했다. 꼭 지금 퇴사해야 하냐며 따져 묻고 싶었다. 사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런데 퇴사 건 입사 건 뭐건 그건 당신의 인생이라 내가 간섭할 수가 없다. 오전엔 같이 볕이 잘 들어오는 1층에 둘러앉아 1시간 정도 티타임을 가졌다. 몇 년 만의 여유인지, 웃음이 절로 났다. 29일에는 3명의 사람이 떠났다. 이 중, 두 명은 나와 친했던 사람이라 마음이 헛헛했다. 가면서 뭘 또 그렇게 주고 가는지 '쓰레기를 주고 가는 거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차와 영양제들을 나에게 다 줬다. 나는 차 안 마시는데.. 속으로만 중얼거렸지만 그 사람들이 주고 가는 물건이라도 붙잡아야 마음 한편이 그래도 덜 섭섭하겠다 싶어 책상 한편에 얹어놓았다. 이번 달만 퇴사자 선물도 3만 원을 썼다. 4월에도 퇴사자 선물로 돈을 쓸 예정이다. 다들 어딜 그리 가는지 마음이 울적하다.


4. 눈 다래끼

: 3월 28일. 침대 위에서 눈을 질끈 감았더니 오른쪽 눈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머리를 산발하고 거울 앞으로 갔더니 오른쪽 눈에 선이 짙은 쌍꺼풀이 자리 잡았다. 눈 두덩이는 연핑크색이다. 눈 다래끼가 났다. 근 7년 만이다. '꽤 괜찮은걸.. 맘에 드는 쌍꺼풀이야' 웬일인지 그때만큼은 긍정적이었다. 근사한 쌍꺼풀은 금요일까지 모습을 유지했다. 핑크색 눈두덩은 마치 섀도우를 칠한 것처럼 고운 색감을 뽐냈다.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 성이 났는지 토요일 아침에는 근사한 눈두덩이 아몬드처럼 변해 있었다. 고운 색감도 그만하고 싶었는지 자주색으로 변해 있었다. '병원에 가야겠는걸...' 주섬주섬 옷을 입고 9시에 잰 걸음으로 병원에 갔다. 근 1년 만에 만난 원장님은 오랜만이라며, 눈 다래끼가 왜 났냐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편두통으로 별로 대꾸할 마음이 안 들어 시큰둥 했다. 되돌아보니 원장님한테 조금 미안하지만 대기시간 1시간 10분이 훌쩍 넘는 안과에는 가고 싶지 않다.


5. 장국영

: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누구는 임신을 했네(justin bieber) 어쩌네 장난질을 쳤지만 만우절은 나한테 입사일 외에는 의미가 없다. 퇴근길에 항상 그렇듯 네이버 영화판에 들어갔다. 네이버 영화판은 내가 네이버에서 가장 좋아하는 판이다. 즐겁게 모든 기사를 읽고 있는데 한 썸네일과 타이틀이 스크롤을 멈추게 했다. '16년 전 오늘, 거짓말처럼 떠난 배우' 그렇다, 장국영이다. 15살, 중2 때 나는 장국영에게 빠져있었다. 그가 나온 영화는 거의 다 찾아봤다. 외골수적 성향은 어릴 때부터 있었다. 16살 나에게 장국영의 자살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믿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하필이면 또 만우절이라 친구가 보낸 긴급 문자를 보고도 '이 친구 저질 개그를 하네'라고 생각하고 그냥 읽씹했었다. 정말 그는 만인에게 '거짓말처럼 떠난 배우'였다. 최근에도 패왕별희를 봤는데 섬세한 그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 영화 러닝타임 내내 너무 좋았다. 그냥 좋다. 옛날 그 중국 영화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 시절의 향이 티비를 뚫고 나오는 것 같다. 그의 기사를 읽으며 퇴근길이 또 한층 고요해졌다. 오랜만에 그가 나왔던 영화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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