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나마나

The library angel

by 고로케


"여러분, 그 있잖아요. 도서관에서 내가 어떤 책을 찾는데 기억이 안 나. 그런데 책장을 지나가는데 우연치고는 딱 그 책만 보이는 거야. 주변에 있는 그 많은 책들은 페이드아웃이 되고. 책장에 그 책만 있는 거지. 그런데 정확하게 내가 찾는 책이 맞았어요. 그 표현이 뭐더라?"


"The library angel이요."


"맞아요, the angel of library. 학생은 나와 같은 경험이 있군요?"


"아뇨."


없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 내가 그토록 찾고 원하던 책만 딱 보이고 나머지는 페이드아웃 됐던 경험. 혹은 도서관에서 자료로 쓸 서적이나 인용문을 이잡듯이 찾다가 우연히 책을 떨어뜨렸는데, '세상에나!' 그 책이 내가 그토록 찾던 책이었던 경험.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The library angel! 도서관 천사! 토요일 오후,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이 내뱉은 숨으로 뜨끈해진 공기에 잠이 솔솔 오던 수업 시간 선생님이 했던 말. 1972년 영국 작가 레베카 웨스트가 도서관에서 겪었던 이상한 일을 표현하면서 사용했던 말인데, 영어 단어 coincidence(우연)의 어원이라 한다. 저런 경험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수강생 모두가 해 본 적이 없어서 나름 안도했다. (왜냐면 아무도 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천사의 도움을 받아 본 적은 없지만, 나는 화장실 천사의 도움은 받아봤다. 어린 시절부터 배가 자주 아파 병원을 많이 다녔다. 병명은 '과민성 대장 증후군'. 누구나 앓을 만한 병이다.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는 (특히 고등학생)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는 불량 청소년들의 흡연율을 줄이겠다며 수업 도중 화장실 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배가 아프던, 목구멍에서 토사물이 넘쳐흐르기 직전까지도 수업 시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장실에 갈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게 참 우습기도 하고 화가 난다. 종교국가에서 신성한 종교 책을 배우는 시간도 아니고 고작 국어, 수학, 과학 등을 배우면서 화장실조차 갈 수 없다니... 이렇게 생리현상을 무조건 참아야 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한 나는 자연스럽게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란 병을 얻었고, 서른두 살이 된 지금도 버스를 타거나 나갈 수 없는 꽉 막힌 공간에 가면 아무 이유 없이 배가 아프다.


그래도 다행인 건 어딜 가든 화장실을 기가 막히게 찾아주는 '화장실 천사'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는 거다. 유달리 긴 출·퇴근시간 덕분에 남들보다 2시간 먼저 일어나 출발해도 지하철에서 화장실 한 번을 못 간다. 촘촘한 출근시간 계획에 화장실 가는 시간 따위는 없다. 갔다 하면 지각이다. 만약 가려면 DC코믹스의 플래시가 뛰어다니 듯 번개처럼 다녀와야 한다. 하지만 몇 년간의 팍팍한 훈련 덕분에 어느 역에서든 여자와 남자가 서 있는 화장실 간판은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선생님의 '도서관 천사' 경험처럼, 모든 신경은 저 멀리 떨어진 화장실 팻말에 집중되고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몸이 이끌린다. 오랜 경험 끝에 '내려서는 안될 역'에 대한 정보도 갖추게 되었다. 내 기준에서 '내려서는 안될 역'은 화장실이 너무 먼 곳이거나 지하철 패스를 한 번 더 찍어야 나갈 수 있는 곳이다. 이 두 악조건이 합쳐진 게 바로 김포공항 역이다.


배가 너무 아파 처음으로 김포공항 역에 내렸을 때 무척 당황했다. 공항철도는 지하 2층에 있나 보다. 지하 3층인가? 여하튼 굉장히 아래에 깔려있다. 올라가고, 올라갔는데 재수 없이 길을 잘못 들면 방화역으로 가는 5호선을 만나게 된다. 실수다. 다급할수록 잘못은 빠르게 인정하고 다른 루트를 찾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미로 속을 고통 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을 느낀 후, 무슨 일이 있어도 웬만하면 김포공항 역에서는 잘 내리지 않는다.


처음 선생님이 '도서관 천사'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그런 꿈같은 경험은 없지만 화장실 천사 경험은 많이 해봤어요.'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목이 간질간질 했다. 하지만 선생님과 나는 초면이었고 쓸데없는 소리로 졸고 있는 학생들을 깨우고 싶지도 않았다. 화장실 천사. 영어로 쓰면 The restroom angel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The toilet angel. 도서관에 있는 여러 명의 천사보다는 볼품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겐 아주 소중한 천사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작은 화장실의 천사들이 오늘도 곤경에 빠진 무수히 많은 사람을 돕고 있을 거라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The temp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