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아사오 하루밍의 <3시의 나>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저자인 아사오 하루밍은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아주 소소한 삶에 대해 짤막하게 글을 쓰는데, 담백하지만 이해하기 다소 어려운 문체에 반해 그녀의 책 여러 권을 읽었었다. 그중, <3시의 나>라는 에세이는 말 그대로 아사오 하루밍이 '오후 3시에 무엇을 했는지?'를 엮은 책이다. 즉, 오후 3시에 쓴 일기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프리랜서 작가로 사는 그녀는 오후 3시에 참 다양한 일을 한다. 동네를 산책하거나, 좋아하는 식당에 가거나, 누워있거나, 고양이 뒤를 밟는다던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그런데 내 삶에서 오후 3시는 그렇게 다채롭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퇴근시간이 지난 오후 7시의 나는 조금 자유롭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단순히 오후 7시의 나를 떠올려 본다.
글쓰기 강의실에 앉아 있다. 분당에서 2시 미팅이 있어 점심을 굶었다. 검색해보니 분당 ak plaza에 쉑쉑버거가 있단다. 30분 일찍 가서 쉑쉑을 먹으려고 엄청 기대했는데 경의중앙선이 늦게 와 쉑쉑은 커녕 커피 한 잔도 못 마셨다. 지하철이 붐볐다. 시간이 없어 저녁도 굶었다. 눈이 퀭하다. 선생님은 며칠 굶고 왔냐고, 밥은 먹었냐고 자꾸 큰 소리로 묻는다. 선생님을 포함해서 18개의 눈이 나를 본다. 그냥 멋쩍게 고개만 끄덕였지만 배가 고파서 글자는 까만 점처럼 보인다. 파란 펜으로 뭔가를 계속 적고 있긴 한데 뭘 적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에게 배고픔은 이렇게도 치명적이다.
수영장이다. 조금 늦게 들어가다가 반가운 얼굴을 봤다. 나보고 웃으라며 스마일 표시를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여덟 개의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뿔싸, 나는 너보고 웃은 거 아니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인사를 한다. 덕분에 오늘은 뺑뺑이 훈련이 아님을 감지하고 나도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몇 달 동안 같은 반이었던 아저씨는 나보고 자꾸 맨 앞에 서라고 한다. 더 열심히 해서 다음달에는 고급반에 가라고도 한다. 앞에 가기 싫어 '싫어요'라고 크게 말했다. 이 한마디로 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아저씨는 멋쩍게 허허 웃는다. 몇 바퀴 돌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내 뒤로 몰린다. 결국 또 1번이 됐다.
이런 젠장. 지하철 역이다. 6시 30분에 딱 나오려고 했건만 한 통의 메일이 왔다. 팀장님이었다. 분명히 30분 전만 해도 '고로케, 오늘은 칼퇴 하는 거야.'라고 힘차게 말하고 나갔으면서 28분에 실적 파일을 보내달라 한다. 숫자가 다르면 또 한소리 들을 테니 다시 확인하고 보냈다. 오늘 공항철도에 사람이 많을까? 조금 늦게 타니까 별로 없었으면 좋겠다. 역에서 집까지 걸어갈까? 연등이 예쁘게 달렸고 불도 켜졌을 테니 걷는 길이 꽤 괜찮을 것 같다.
교회다. 내일 부활절 칸타타를 위해 찬양대 연습을 하러 왔다. 하루 종일 목을 썼으니 저녁이면 오히려 목소리가 더 잘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다. 목이 더 잠긴다. 원래 성량이 작아서 소리가 그렇게 크지 않은데 저녁이라 더 잠긴다. 지휘자 선생님은 두성을 내라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몸은 안 따라주는 느낌. 맨 앞줄, 그것도 가운데가 싫어서 2층으로 슬금슬금 올라갔다. 지휘자 선생님이 바로 내려오라 한다. 간주 시간에 지루해서 어깨춤을 췄다. 간주하는 동안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으라 했다. 가만히 서있기가 여간 힘들다.
푹신한 문체어에 몸을 잔뜩 욱여넣고 감자와 같이 앉아 있다. 감자는 내 몸에 거의 붙어있다. 하루 종일 붙어있고, 하루 종일 안아달라고 땡깡을 피운다. 두부는 벌써 시야에서 사라졌다. 불러도 안 온다. 그래도 과자 먹자고 부르면 어디선가 잽싸게 달려온다. 저 자식, 아무리 생각해도 과자 먹으려고 나를 이용하는 거 같다. 아니면 감자 돌보기가 귀찮아서 나한테 맡긴 느낌이다. 그래도 애들의 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까만 눈동자 안에 더 까만 동공이 있다. 그 안에 내 실루엣이 보인다. 너희는 나를 보고 있는 걸까? 작은 두 눈과 작은 머리에 내가 가득 들어있을까?
회사다. 야근이다. 오늘 의외로 예상치 못한 일이 많았다. 늘 그렇지만. 씨리얼을 먹고 집에 갈지 말지 고민이다. 본부장님이 큰 화분에 물을 준다. 저 화분은 내 자리에서 제일 가까운데 오늘 처음보는 기분이다. 잠시 ‘내가 저 화분을 관리해볼까’라는 생각을 해봤는데 저렇게 큰 식물이 내 관리 부실로 죽으면 왠지 슬플거 같다. 7시 반에는 회사에서 나가야지 생각하는데 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처음에는 형편없을 거 같아서 다 지우고 다시 쓰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알찬 7시였네. 내년 일기는 <오후 0시의 나>로 기획해서 써봐야겠다. 365일 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