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을 함께 지낸 친구가 있다. 그래도 20대 초반까지는 몇 개의 모임에 나갔는데 대학교 시절을 지나면서 중·고등학교 애들과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졌다. 정말 '학창'시절 친구는 네, 다섯 명 있는 거 같다. 그중, 나와 가장 친했던, 정말 나의 A부터 Z까지 알고 있는 네가 결혼을 한다. 처음엔 당황했고, 시간이 지나니 황망하며 나의 청춘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년 이 무렵에 대학시절 친구부터 그냥 알던 애들 몇몇이 결혼을 했다. 그 이후, 나는 정말 습관적으로 '뭐 해?' 혹은 '야, 뭐 하냐?'라는 카톡이 갑자기 오면 '너 결혼하냐?'라고 물어보곤 했다.
내 18년 지기와는 매일같이 라인을 보내지만 마치 권태기가 온 부부처럼 하루에 하나 정도, 아니면 하루에 2개 정도의 짧은 대화만 나눌 뿐이다. '개웃기네' '개힘드네' '개빡치네' '개미쳤네' 등, 우리는 주로 '개'가 나오는 대화만 나누긴 하지만 별 말 안해도 서로가 잘 지내는지, 좋은지, 나쁜지 정도는 다 알고 있다. 어느 날이었다. 평소대로 쌀국수를 먹으러 갔다. 2시간이 넘는 퇴근길에 지쳐있었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날도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대화를 나누다 '왜, 너 결혼하냐?'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 결혼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주마등처럼 옛날 시절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너와 너무 많은 걸 했다. 정말 지나치게 많은 걸 했다. 너무 많은 장소에 갔다. 나는 심지어 그게 후회 된다.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건 이제 기억도 잘 안 난다. 밤에 교내 대나무 숲을 파헤치고 타임캡슐을 묻었던 것, 같이 다녔던 수학학원에서 내가 첫 눈에 반했던 남자애가 단 한 번도 순대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 거에 충격받았던 것, 이런 자잘한 기억들. 우리는 20대를 통으로 같이 보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냈던 문자는 '나 장염 걸렸어'였다. 나는 그 문자를 받고 화가 났다. '그 말 하려고 미국까지 문자를 하냐? 장염 걸렸으면 병원에 가.' 이런 별거 아닌 대화까지 기억난다. 대학교 졸업, 남자 친구와의 설레는 만남들, 별 거 없었던 이별, 묵직했던 취업 준비, 그리고 첫 취업 등. 우리는 함께 너무 많은 것들을 했고, 공유하고, 지나치게 매일 같이 많은 곳을 같이 다녔다.
아! 처음 결혼한다는 얘길 들었을 땐, 축하한다는 말도 나오지 않고 '도대체 나는 이제 앞으로 누구랑 놀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의 추억과 젊음과 모든 것을 뺏긴 기분이었다. 의외로 마음은 다시 차분해졌다. '우리의 삶이 변하고 있구나, 네 삶의 지반이 먼저 흔들렸고 움직였구나.' 곧이어 생각이 정리됐다.
너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가 2018년 10월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또 많이 지났다. 결혼 전에 마지막으로 같이 떠난 여행지는 포항이었다. 낯선 곳이었고 정말 예뻤던 곳이었다. 날만 조금 따뜻했어도, 내가 춥다면서 칭얼거리고 난리를 치지만 않았어도 더 많은 야경을 보면서 다닐 수 있었을 텐데 아주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히 '우리 서로 피곤하니까 KTX에서 계속 자자'라고 네가 먼저 말해 놓고 너 왜 이렇게 잘 자냐며 잠 못 자게 끊임없이 말 시켰던 네가 생각난다. 우리 대화 주제도 '회사'와 '삶', 그리고 '돈'에서 '결혼'으로 바뀌었구나.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게 너무 좋지만, 한편으로는 가정을 꾸리는 너와 내가 나중에는 할 말이 없어지는 날이 올까 봐 조금 두렵다.
청첩장을 그려주겠다 약속했는데 어영부영하다 늦어버렸다. 그래도 그림 쪼가리라도 들이밀고 싶어서 지난 2주 동안 주말마다 그렸다. 두 장을 그렸는데 모두 좋아해 줘서 기뻤다. (첫 번째(썸네일으로 사용한 그림이다)는 너무 선남선녀라 어딘가 사용하기엔 죄짓는 기분이라 했다. 두 번째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식물들이 더 싱그러웠으면 좋겠다느니, 왜 결혼식 날짜를 못 외우냐느니, 수정사항이 너무 많아서 일단 차주 토요일까지 수정해 주기로 했다.)
살다 보면 여러 감정을 느끼지만 이렇게 아쉽고 어려운 감정은 처음이다. 내 아쉬운 마음과 축하하는 애정의 말들을 포항에서 밤바다를 보며 말해주려 했는데.. 마지막 날에 내가 너무 졸려서 고등 래퍼를 보다 먼저 자버렸다. 너는 대화를 더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미안하다. 내 감정을 한 번도 말로 꺼내지 않았고, 이 글을 너한테 보여 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나의 아쉬운 이 마음들을 결혼 전에 꼭 말해주고 싶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시간도, 역사도, 삶도... 타인을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게 설령 내 남편일지라도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1+1=1이 될 수는 없다. 머리로는 너무 잘 알고 있는데 가끔은 내가 정말 사랑하는 타인이 나를 자기 자신처럼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나도 섭섭하고 슬프다. 그래, 나는 이기적이다.
평소에 결혼식 때 우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우는 친구를 주책바가지라고 타박했다. 이번 결혼식은 좀 다를 것 같다. 글쎄, 슬프다기보다는 마음이 굉장히 허전하다. 나의 반쪽이 떠나는 느낌이다. 내가 오열하면 안 되니까 옆에 누군가라도 끼고 가야 하나 싶다. 나한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사람은 몇 명 없다. 5월 12일, 그날에 나는 강백호처럼 뛰어올라 너의 부케를 받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