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직접 만들거나 호캉스를 떠났다. 같은 패턴으로 몇 년을 살다 보니 연말이 기대되는 건지 선물 만들 생각에 들뜨는 건지 호캉스나 여행에 설레는 건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떠오른다. 창작의 고통이라느니 해마다 말도 안 되는 우스갯소리를 떠들어 댔지만 올 연말에는 정말 창작의 고통에 시달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무식한 사람의 호기로움'에 머리도, 손도 고생했다고 말하고 싶다.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회사 책상도 지저분하지만, 정정하겠다. 내 책상은 내가 보기에 매우 알맞은 구조로 되어있다. 물건이 적재적소에 쌓여있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내 책상을 보고 '편집장의 책상'이라고도 했고 '천재의 책상'이라고도 했다. 퍼즐 같은 공간에 필요한 물건은 다 있다. 단 한 번도 '이거 어디 갔어?'라면서 책상을 휘저은 적이 없다. 여하튼 가방 속은 사정이 좀 다르다. 자잘한 물건들은 책이며 노트며 큰 물건에 깔려 물건을 꺼낼 때면 매번 손가락이 찢어지곤 했다. 너무 짜증이 났다. 그때였다.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단 한 단어. '미니 복조리 파우치!'
호기롭게 포토샵으로 그림을 그려 원단을 제작했다. 원단.. 뭐가 뭔지 모르겠다. 옥스포드 면으로 시작해보자. 배송된 직후 원단을 보고 당황했다. 나는 자잘한 붕어 패턴을 원해서 포토샵으로 패턴 도장까지 찍어 보냈건만 대왕 붕어들이 큼직하게 그려져 있었다. 괜찮다. 나름 귀엽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요즘은 유튜브를 많이 본다지? 유튜브를 보고 나니 복조리 파우치 따위는 쉽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만이자 편견이었고 오판이었다. 열심히 재단하고 손바느질로 복조리 한 개를 완성했을 때 급성 편두통이 왔다. 그도 그럴 듯 2시간이 넘게 몸을 움츠리고 바느질만 했으니 편두통이 올 만도 했다. 밤 12시, 편두통 약을 먹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생각이 들었다. 재봉틀을 사야 하나 싶었다.
수소문 끝에 후룻에게 재봉틀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분명히 재봉틀이 가볍다고 했는데 들어보니 나는 못 들 정도로 무겁다. 이거 족히 15kg은 넘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후룻 사부에게 재봉틀 사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잊지 못할 행복한 순간이었다. 붕어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의 순간이었던 거다!
하루 만에 붕어들을 만들기는 힘들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라는 거에 잠시 현타가 왔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점심시간마다 닌자처럼 건물을 넘어 재봉틀을 찾아갔다. 누군가 나를 수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고민했지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 마음 편히 재봉을 하고 1시에는 다시 본부로 넘어가 일을 했다. 히죽히죽 웃으며 들어오는 나를 보고 옆자리 대리가 의문을 표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내 입에도 오버로크를 채운 순간이었다.
24일 오후까지 열심히 재봉틀을 박은 결과 3개 정도를 제외하고 모든 파우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3개는 손바느질을 할 거다) 25일 밤 9시부터 열심히 조리개 끈을 끼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좁게 입구를 만들어서 그런지 손톱이 빠질 것 같은 고통과 메슥거림이 올라와 옘병천병 욕이 나왔지만 빳빳하게 자리 잡은 붕어 녀석들을 보니 마음이 흐뭇했다. 여기까지다. 내년부터 파우치 제작은 없다.
'연말정산'이라는 책이 있다. 책이라기보다는.. 그냥 한 해를 정리하는 100가지 질문으로 적혀진 노트 형태의 워크북이다. 올해 연말 여행은 강릉으로 행선지를 정했기에 고민하다 연말정산 워크북을 사서 가기로 했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28일 새벽 3시까지 서로의 2019년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했다. 올해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연말정산을 하면서 한 해를 정리하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꼭 일출을 봐야 한다고 잔소리하는 친구 옆에서 심드렁하게 잠을 잤다. 아침 7시 20분에 일어나 침대에 앉아있자니 날도 춥고 만사가 귀찮았다. '가지 말아야겠다' 생각하고 다시 누우려다 창밖을 봤는데 검정 패딩을 입은 무리가 횡단보도를 향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숙소에서 바다까지는 3분. 저 사람들은 먼 곳에서도 일출을 보러 뛰어오는데.. 나는 뭔가?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여서 대충 겉옷만 입고 일출을 보러 나갔다.
2019 연말의 연말이 각자의 모양과 색으로 채워지고 있다. 나름 재밌다. 나는 1월을 극혐하는 사람인데, (뭔가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는 느낌, 하지만 내 삶은 변할 것도 없고 변할 수도 없고 늘 똑같다는 사실. 그 두 사이의 간극이 싫다.) 1월에도 연말처럼 뭔가 재미있는 것을 한번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