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쓰나마나

유자의 마음

by 고로케

크레이프처럼 한 겹 한 겹 조심스럽게 쌓아둔 유자의 자아가 최근 한순간의 삐긋거림으로 박살이 난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개박살이 났다 하겠다. 유자는 나이가 들수록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행동해야 하는 게 여간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자의 부모는 전형적인 4-50년대 사람이었고, 때가 되면 밥을 먹는 것처럼 나이에 맞게 학교를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사는 거라는 주입식 교육을 수십 년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 통념은 유자에게 대물림 됐고 그 통념의 무게를 견디는 건 오롯이 유자 몫이 되었다.


유자는 대부분 부모 말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을 한 적은 없지만 교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고, 이런 회사는 때려치우고 공무원이 되라는 말도 듣지 않은 채 7년이나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유자는 경제가 어려우니 회사에 말뚝을 박으라는 부모의 말을 또 뒤로 한채 어딘가로 향했다. 유자는 그랬다. 그냥, 유자는 아주 작은 반항이라도 하고 싶었나. 생각해보면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는데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었다.


그랬던 유자가 38살을 맞이하던 생일날, 10살 어린 정을 만났다. 정은 그저 그렇게 지나가다 우연히 알게 된 사람 중 하나였고 친한 사람도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은 모르는 사람에 가까웠다. 정의 장점이자 단점은 호박 보석을 꽂은 것처럼 눈이 반짝거린다는 건데, 유자는 그런 정 앞에 설 때마다 왠지 모르게 작아지는 기분이 항상 들었다. 유자는 정의 눈을 좋아했지만 싫기도 했다. 그의 눈은 밝고 정직하고 희망차고, 때로는 사회를 비웃는 듯한 느낌도 들어서 유자는 그 눈을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그랬다. 정과 유자는, 그저 그런 사이였다. 그리고 유자의 자아가 개박살이 난 건 바로 그날이었다.


정은 그날도 유독 반짝이는 눈과 통통 튀는 말투로 유자를 반겼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회사 이야기를 했고, 평범한 이야기를 했지만 유자는 정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 어서 말해봐. 40대를 향하는 네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그런 것들에 대해' 정의 눈빛은 유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했다. 유자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내가 아는 유자는 키도 작고 왜소하고 아주 착하지만 또 당차기도 했는데, 항상 뭔가를 쫓고 있었다. 하얗고 작은 두 손 가득 뭔가를 쥐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되뇌었다. 생각해보면 미디어가 만든 행복한 골드 미스라는 40대 이미지는 유자에겐 한 번도 보지 못한 오로라와도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정과의 만남 이후, 집에 가면서 유자는 휴대폰에서 정의 번호를 지우고 메신저를 숨겼다. 차단할 용기마저 없었다. 유자는 그 뒤로 정과 연락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유자는 스스로를 자책하기 시작했다. 유자의 자아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유자는 그날 이후로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했고 미래를 보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유자는 굴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울기도 해보고 화도 내보고 멍하니 있어 보기도 했지만 그 어느 것도 유자를 위로해 주진 못했다.


유자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 사이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회사 동료는 아이 돌잔치를 한다며 함박웃음을 지었고 친구는 둘째를 임신했다며 태아 사진을 보내왔다. 나이 든 아버지는 힘들어서 일은 못하겠고 노후대책은 못했으니 경비원으로 취직할 자리나 찾아보라며(정확하게는 청탁이라는 표현을 썼다) 유자에게 툴툴거렸다. 유자는 그렇게 집 안팎에서 설자리를 잃은 채 까맣게 변해갔다.


내가 아는 유자는 밝은 빛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자 주변은 늘 파스텔 빛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유자는 따뜻했고 밝았고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지만 요즘의 유자는 그렇게 빛을 잃었다. 그리고 2주 뒤, 유자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나타났다. 그 사이 유자가 어떤 생각과 경험을 통해 낙심을 걷어냈는지 아무도 모른다. 혹은 여전히 낙심의 늪에서 나오는 중일 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유자가 평생 빛과 웃음을 잃지 않고, 빛 가운데로 힘차게 뛰어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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