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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론 Aug 29. 2022

나를 당신의 세상에 초대해주세요

눈앞의 사람에게 친절할 이유

휙.탁.

내 앞으로 빵이 던져진다. 빵을 담는 쟁반이 따로 있는 파리바게트에서는 거의 없는 모습이지만 간혹 손으로 빵을 집어와 던지는 손님이 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모든 빵은 오후가 되면 비닐 포장을 해 두고 있기에 손으로 집는 건 괜찮다(살 거라면). 던져지는 빵을 집어서 계산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마음이 좋지 않을 뿐이지.


사실 던지는 손님이나 트레이에 담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손님이나 해야할 일엔 별반 차이가 없다. 오히려 가져와서 던지는 쪽이 계산할 물건은 적은 편이다. 근데 왜 기분이 나쁠까? 아마 주변에 이 상황을 얘기하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당연히 기분 나쁘지"라고 거들어줄 것이다. 그렇다. 기분 나쁠만 한 행동이다. 하지만 나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알고 싶다. 모든 기분나쁨을 '그냥 기분나쁨'으로 뭉뚱그리는 건 싫다. 나쁨의 뒤에 분류가 적힌 꼬리표를 붙여서, 파일철에 정리해서 파일꽂이에 꽂아서, 연도별로 모아두고 싶다. 적어도 연도별로 모인 '기분나쁨'의 사유들을 모아서 보았을 때 똑같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기분 나쁠 일은 언제나 생기지만 그걸 대하는 태도만이라도 성숙해졌으면 하니까.


빵을 던지는 손님을 '불친절한 손님', 순화시켜 '친절하진 않은 손님' 정도로 본다면 친절이란 건 뭘까? 감정일까 태도일까? 분류는 무엇이고 왜 친절의 부재가 아프게 느껴질까? 빵을 던지는 것도 불친절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친절한 사람일까? 친절한 사람이란 게 있을까? 빵집의 일들은 생각하며 하기 좋다. 유리세정제를 걸레에 뿌려 창과 문을 꼼꼼히 닦으면서 내 뇌는 느릿느릿 생각을 이어간다. 잠깐 멈추기도 한다. 케이크 진열장을 닦을 땐 이런 생각조차 비우고 초집중해야 한다. 좌우로 걸레질을 할 때는 조금만 거칠어도 케이크의 옆면을 찌르기 쉽다. 케이크 진열장까지 다 닦은 후 나는 잠시 카운터로 돌아온다. 그리고 새로운 손님이 온다. 


아까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남자 손님이다. 별말없이 빵 쟁반을 앞에 내려두시기에 나는 "계산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포스기에서 빵을 찾아 찍는다. '소보루빵은 점심시간이 되면 빵으로 간단히 한 끼 하고싶은 분들이 많이 사가시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며 입으로는 할인과 적립 등을 묻는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생각중인 말과는 다른 영업용 멘트를 뱉는 것에 익숙해진다. 나는 손님들이 사는 빵에 대해서 '아 그 빵 자주 찾으시네요' '빨리 나가는 빵인데 마지막으로 겟하셨네요' '저도 그 빵 좋아합니다' 등 다양한 생각을 하지만 아무도 나의 생각을 듣고 싶어하진 않을 걸 알기에 입으로는 기계처럼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만 뱉는다. 모두가 궁금한 통신사 할인, 포인트 적립, 봉투는 얼마인지 등.


"참 좋은 낮이죠?"

네? 갑자기 우주까지 갈 뻔했던 생각이 단숨에 땅으로 끌어당겨진다. 내 앞에 계신 아저씨가 웃고 있다. 카드를 집어넣으면서 또 말씀하신다.

"오늘 날이 정-말 좋은 것 같애." 

"아 그렇죠? 비가 오다 간만에 맑은 날이네요." 

"그러니까! 하하. 수고하세요."  

소보루를 들고 홀연히 사라지는 아저씨. 멍하니 문을 쳐다보던 나는 뒤늦게야 심장이 막 뛴다. 맞아요! 좋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낮이죠. 근데 아저씨가 그 말을 해주시기 전까지 저는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아저씨의 말 한마디로 좋은 낮, 좋은 날인 걸 깨닫고 우주에서 지구로 끌려내려와 비로소 창밖의 길이 얼마나 오후의 볕으로 빛나고 있는지를 본다.


친절이란 친과 절이 합쳐진 단어다. 친할 친(親)에 끊을 절(切). 끊을 절은 이 경우에는 '정성스럽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사전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친함을 어느 정도에서 끊어낸다는 의미로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친함이 계속되면 그건 사랑이지. 친절이란 거리두기구나. 하지만 사전을 찾아보니 '끊을 절'자가 정성스럽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대할때 정성을 다하는 경우는 언제일까? 나의 영역에 상대방이 들어와 있을 때 정성스럽게 모시겠다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중요한 것은 정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나에게로 초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먼 거리의 누군가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친절하기 위해서, 정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나의 세계로 초대해야한다.


친절하지 못한 손님에게서 나는 소외감을 느낀다. 잘 모르는 사람 한 명에게서가 아니라 인간사회에서의 소외감이다. 인간으로서 대해지지 못하고 계산을 해주는 키오스크와 같은 무언가가 된다. 흔히 볼 수 있고 쉬운 일을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은 인간인데 초대받지 못한 이방인이 된다. 감히 가끔은 딱하다고 생각한다. 그 손님은 누군가를 자신의. 우주에 초대하기엔 마음이 너무 좁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상처받고 누군가를 초대해 곁에 두기가 두려운 걸지도 모른다. 


좋은 낮이라던 아저씨와의 대화는 나도 같은 인간사회에 속해있다는 일깨워준다. 지금은 계급사회도, 인간이 로봇을 하인처럼 부리는 사회도 아니지만 묘하게도 그런 인간소외가 숨쉬듯 자행된다. 때로는 오가는 한마디가 나도 모두와 같은 사회의 인간이구나 하는 안도 섞인 자각을 준다. 좋은 낮이라던 아저씨와의 대화는 나도 같은 인간 사회에 속해있다는 걸 일깨워줬다. 그렇지,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은 이런 것이었지. 서로의 태도를 주의깊게 살피기도 하고 눈앞의 일과 상관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만들어가는 인간의 방식이다. 모든 것을 서로에게 기능만을 원하는 인간 인간이 아니다. 사회는 가끔 그렇게 몇몇 사람을 비인간의 영역으로 밀어넣는다. 나에게 불친절은 그런 사회의 작은 일면이다. 


좋은 낮 혹은 좋은 하루라는 인사를 습관적으로 나누고 계실 아저씨께, 씨를 뿌리는 사람을 응원하듯 조용히 마음 속의 응원을 보낸다. 계속, 그렇게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 느낄 수 있도록 대화의 씨를 심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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