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보리가 수확을 기다리는 이맘때쯤이면 제주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손바닥만한 크기, 옹골찬 외모의 자리돔이다. '돔' 중에 가장 작고 못생겼다는 말을 듣지만 그러면 어떠하리. 여름내 제주바다와 제주밥상 위, 자리만한 것이 없음을.
제주에서 자리돔은 '자리'라 불린다. 6~7월은 자리의 산란기로, 연중 자리돔이 가장 맛들 때다. 몸길이는 10~18cm 정도로 제주 남해 동부, 동해 남부에 주로 서식한다. 자그마한대로 무리를 지어 살며,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이로 삼는다.
여름빛을 물고 제주 연안으로 생기롭게 몰려온 자리는 잃어가던 기력도 되살린다. 오랜 시간 자리에게 여름입맛을 맡겨온 도민들은 씹을수록 진해지는 자릿살의 고소함, 특유의 감칠맛을 즐긴다.
제주 옛말에 제주도 노인은 허리 굽은 사람이 없다는데. 어릴 적부터 칼슘 가득한 자리를 섭취한 덕에 등굽은 노인이 적다는 민간의 이야기이다. 그만큼 자리에는 이로운 영양소가 풍부하다. 칼슘과 철분이 많아 빈혈에 좋고. 비타민A도 함유돼 눈 건강에 이롭다. 더군다나 단백질이 풍부하고 기름기가 적어 칼로리 걱정 해소는 물론 소화까지 잘 되는 착한 생선이다.
본토박이 부모님에 따르면 제주 자리는 보목과 모슬포가 유명하다. 보목자리는 크기가 작고 뼈가 부드러워 많은 사람들이 찾지만 살까지 연해 씹는 맛이 덜하고, 모슬포자리는 뼈가 센 대신에 크기가 크고 살이 탱탱해 씹는 맛이 있단다. 이렇게 취향 따라 갈리는 자리돔, 지금 제주에서 다양하게 만나보자.
자리물회
제주식 물회의 핵심은 된장과 제피다. 된장, 식초, 제피 말고 들어가는 것도 없는데 여름 한철을 책임지는 맛이다. 여기에 청양고추를 썰어넣으면 개운함이 더해진다. 가장 대중적인 제주 물회는 단연 자리물회다. 누군가 "제주의 진짜 맛은 자리물회"라 했다. 차디찬 된장국물에 섞여 입안으로 들어온 싱싱한 자리회가 입안에서 오독 쫄깃하게 씹힌다. 여기에 아삭아삭한 미나리, 오이가 풍미를 더한다.
접시에 따로 내어주는 초록잎 '제피'는 거부감 적은 특유의 향긋함으로 작은 비린내까지 잡아낸다. 얼음 동동 뜬 자리물회의 통쾌한 역습엔 집 나간 입맛도 버티지 못하고 돌아온다. 이 국물에 찬밥을 말면 식감이 꼬들해지는데, 여기에 한 번 맛들이면 이렇게만 먹게 된다.
자리강회
자리강회는 뼈째 오도독 씹는 맛이 있다. 자리돔을 잡자마자 비늘, 내장, 머리, 지느러미, 핏물을 깨끗하게 제거하고 뼈째로 어슷하게 떠 상에 올린다. 입안에 퍼지는 자릿살의 감칠맛과 고소함, 오독거리는 식감이 일품이다. 신선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리강회는 된장과 먹어야 입에 착 감기는 맛이 있다. 각종 채소를 넣은 양념 된장과 어우러짐이 좋다.
자리구이
자리는 크기도 작고 뼈가 많은 생선이지만 구이로 먹었을 때 그 고소함이 제일이다. 뼈가 세서 회로 먹기 힘든 큼지막한 자리들을 골라 내장 그대로 직화에서 굽는다. 참기름을 바르고 굵은소금을 뿌려 굽는데, 풍미와 고소함이 여느 큰 고기 못지않다. 보기와는 달리 살이 두툼하게 나오는 밥반찬이다. 자신 있는 건치들은 뼈째로도 즐긴다.
자리는 예로부터 척박한 제주땅의 여름밥상을 책임진 토착 생선이다. 최근엔 환경의 변화로 수확량이 예전보다 못하다지만, 자리는 여전히 제주 여름바다의 주인 자리를 꿰차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경험했다. 평범한 일상은 언제고 그리움으로 바뀔 수 있음을. 여름과 함께 돌아온 자리의 철, 가족과 함께 제주의 맛을 찾아 나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