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내가 20대 초반 대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 무뎌질 때도 된 것 같지만, 문득 아빠가 생각나고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요즘 아가를 키우면서 아빠 생각이 더 많이 난다. 딸 바보였던 아빠이기에, 내 딸을 누구보다 예뻐했을 것이기에, 예뻐하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프고 안타깝다.
아빠 때문에 힘들었던 일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기억만 나는 것도 신기하다. 누군가와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미화되나 보다.
아빠의 기일이 속한 달이 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당시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아빠가, 한순간 정신이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아빠가 내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빠의 장례식에 오셨던 아빠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아빠가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이야기해주셨다. 아빠와 많이 닮은 나를 보며, 많이 우신 분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넋이 나가 있었고, 너무 많이 울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많이 슬프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내게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 때이기도 했다.
나는 딸을 남편에게 많이 맡기는 편이다. 아빠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딸과 남편이 친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남편과 딸이 손을 잡고 걷거나, 딸이 남편에게 안겨있는 모습을 보면, 아빠와 나를 떠올리게 돼서 기분이 묘하다. 나도 아빠랑 저랬지. 아빠도 나를 많이 안아줬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잔소리를 한다.
딸과 남편의 모습에서 나와 아빠의 모습을 본다. 앞으로도 둘의 모습을 보면서 아빠를 추억하고 싶다. 그러니 우리 가족 모두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제발.
대학을 졸업했을 때,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아빠랑 거하게 한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 아빠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많이 울었다.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렸는데 우산을 가져가지 않아서 젖은 상태에서, 빨리 달리는 자동차에 흙탕물이 튀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빠에게 칭찬받고 싶었던 날이지만, 너무나 초라하고 초췌한 몰골로 자취방에 돌아와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나와 관련된 행사가 아니더라도, 축하나 위로가 필요한 자리에 갈 일이 생기면 아빠가 생각난다. 물론, 경사에는 당사자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가고, 조사에는 당사자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 기본이지만,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순간이 가끔 있다.
결혼식에서 슬픈 순간은 여러 번 있지만, 친정 부모에 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나 부부가 친정 부모에게 인사할 때 슬퍼진다. 아니, 슬프다기보다는 부럽다.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 아빠는, 가끔씩 내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함께 걷는 연습을 하셨다. 입으로 "딴따따딴~"이라고 흥얼거리면서. 결국 아빠는 그 연습을 실행하지는 못했고, 나는 그 길을 남편과 함께 걸어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사는 돌잔치다. 그래서 돌잔치는 거의 가지 않았다. 우리 아가의 돌잔치도 가까운 친척과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행사 진행하면서 돈돈 거리는 게 싫고 무엇보다 아가와 양가 부모가 함께 사진 찍는 그 장면이 싫다. 양가 부모가 안 계시거나 한 분만 계신다면 너무 실례되는 장면이다. 부모가 모두 있는 가족이 당연한 가족 구성인 듯 인식시키는 그 장면이 너무 불편하다.
연세 많으신 분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경우나, 동년배의 조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동년배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는 남 일 같지 않다. 특히, 어린 자녀를 남기고 돌아가시는 분의 경우에는 마음이 더 아프다. 결핍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지만, 이런 결핍은 최대한 늦게 겪는 게 좋다.
나이가 들면서 지인 부모의 건강검진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건강검진을 해서 아픈 부분을 발견하게 됐다거나, 생신 선물로 건강검진을 시켜드렸다는 등의 이야기. 우리 아빠는 암 말기 판정을 받고 돌아가셨다. 암세포가 자랄 동안 꽤 고통스러웠을 텐데, 집안 경제 상황이 너무 나빴을 때라서 제대로 된 검사를 받을 수 없었다. 아빠는 병원에 갈 수 없으니 그저 참았을 것이다. 그래서 조기에 암을 발견하지 못해 치료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당시 나는 등록금이 부족해서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가끔 생각한다. 아빠의 위암이 5년 후에만 발병했다면, 내가 건강 검진을 시켜드려서 암을 발견하고 치료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
아빠의 장례식 때 한 사촌이 내게 한 말이다. 나는 그때까지 친척 앞에서 의견을 제시하거나 큰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면서 소리 질렀다. 돈 버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데 어떻게 발견하냐고. 네가 그렇게 돈 벌어봤냐고. 그 당시 사람들이 날 어떻게 봤는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막 퍼부었던 내 모습만 기억날 뿐.
술을 좋아하던 아빠는 종종 속이 더부룩할 때마다 사이다를 마셨고, 내가 속이 안 좋다고 하면 사이다를 사다 주셨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속이 좀 안 좋다 싶으면 사이다를 찾는다. 그러면 아빠와 같이 마시던 때가 생각나서 편안해진다.
요즘 아빠가 많이 생각날 때는, 추석이나 설 등의 명절이다. 가족이 모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에 언급한 경우(기일 제외)는 가끔 생기는 일인 반면, 명절은 해마다 돌아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첫 명절에 시가에 갔을 때, 며느리들이 친정에 가는 시간 즈음, 우리 부부도 아빠에게 갈 준비를 했다. 그때 한 어른이 우리에게 더 있다 가라고 하셨다. 첫 명절에 여러 가지로 서운하고 기분 나쁜 일이 많았는데, 유난히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기댈 부모가 없다는 건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 들지 않게 열심히 살아왔고 내가 살아온 길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하지만 결혼 후에 명절만 되면, 친정이 없다는 허전함을 매번 느끼게 된다. 해가 지날수록 남편과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조율하고 있지만 가끔씩 비슷한 일이 생기면 상처를 입고 만다.
아빠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 꿈에 아빠가 나타난 건 꽤 오래전이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지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어딘가에 환생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빠가 만약 환생을 했다면 그 생에는 만수무강하길 간절히 바란다.
내 추억 속에서만 살아 있는 아빠, 추운 겨울이면 나와 함께 먹을 따뜻한 간식을 가슴에 품고 퇴근하던 아빠, 내가 환갑이 넘어도 자신의 눈에는 아가일 뿐이라던 아빠, 노래방에 가면 나훈아의 "사랑"을 불러주던 아빠, 딸이랑 한잔한다고 하면 친구들이 부러워한다고 행복해했던 아빠, 편지를 써주던 아빠, 항상 나를 자랑스러워했던 아빠. 미래의 사위 테스트 목록(내 남편은 통과하지 못했을지도)을 작성하던 아빠.
이번 추석도 역시, 아빠가 많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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