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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에 커피를 흘리다

by 고양이상자

약속 장소에서 커피 한잔을 샀다. 너무 묽어서 커피향조차 희미한 따뜻한 물. 다신 그곳에서 커피를 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러 의견을 나누고 결정하면서, 짧지만 알찬 만남을 마무리했다. 한 고개 넘었다고 생해서 긴장이 풀렸던 걸까. 때리면서 커피를 들었는데, 제대로 잡지 않았는지 그대로 놓쳤다. 아가를 낳고 키우면서 손 힘이 없어지니 뭐든지 가끔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렇게 어이없게 놓친 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마련한 귀한 노트북이라서 항상 키패드를 덮어썼는데 아가가 꾸 뺏어가길래(일 시작하면 방해하는 고양이처럼) 아예 빼서 아가에게 줬더니 이런 일이 생겼다. 하... 내 탓이지, 뭐. 키패드가 어디에 있는지 어서 찾아야겠다. 아무리 일정이 빡빡해도, 아무리 아가 혼자 잘 놀고 있어도, 절대 노트북은 열지 말아야지.


먼저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노트북과 연결했던 어답터와 마우스를 뽑았다. 분리라는 단어보다 뽑았다는 단어가 와 닿을 만큼 확 뽑았다. 휴지 안 가지고 다니는데 다행히 가방 속에 아이 손수건(요즘 쌀쌀해져서 아이 목에 둘러줬던 것을 넣어두고 빼지 않은 것. 풀겠다고 징징거린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이 있어서 그것으로 커피를 흡수했다. 그리고는 혹시 안 쪽에 있는 커피가 나올까 싶어 노트북을 엎어놨다.


그 후, 급히 서비스센터를 검색하고 가장 빠른 시간인 다음날 오전으로 예약 접수했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면 흐를수록 안 좋을 것 같아 불안해서 서비스센터로 달려갔다. 노트북은 가방에 넣지 않고 엎은 상태로 들고 갔다. 어정쩡한 내 모습.


평일이어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기사님이 노트북을 분해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떨렸다. 노트북 세척하면서 남아있던 커피 몇 방울이 나왔지만, 기사님이 대처를 잘했다고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십년감수.


정신없던 하루. 바빠도 정신 좀 챙기라고 이런 이벤트가 발생했나 보다. 이상하게 아이패드나 휴대폰으로 작업할 때는 커피 생각이 안 나는데 노트북으로 작업할 때는 기본으로 커피를 세팅하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단 말이지.


아무튼,

다행이다. 거의 다 마신 상태여서.

다행이다. 평소와 달리 라떼 아닌,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다행이다. 묽은 커피향 물이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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