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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Oct 07. 2020

<오발탄 > 비극적 리얼리즘이 주는 힘

당시 흥행에는 실패했던, 그러나 한국 영화 최고의 걸작.

'고사리'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고전영화를 우선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가장 먼저 어떤 영화를 이야기할까, 라는 질문에 유현목 감독의 1961년 작품, <오발탄>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한국 영화 중 가장 최고로 치는 영화이기도 하거니와, 실제 여러 평론과 기관 조사에서 한국 영화 사상 손에 꼽히는 명작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해낸 작품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이미 온라인에도 <오발탄>을 검색하면 많은 정보가 있을 만큼 이 고전 영화는 현대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 (이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오빠, 어떻게 하면 미칠 수가 있어요? 
[출처]  <오발탄> 한국영상기록원

주인공 철호(김진규 분)의 여동생 명숙(서애리 분)은 상이군인의 연인이자 직업을 구하는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가 일할 곳은 마땅치 않다. 명숙의 맞은편에 서 있는 둘째 오빠 영호(최무룡 분)도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일을 구하기 위해 공사 중인 다방으로 미리(김혜정 분)을 찾아온 명숙은 영호와 마주치고 무너지지 않는 벽처럼 높은 현실에서 힘없는 말다툼을 하다 기어이 명숙의 입에서 "오빠, 어떻게 하면 미칠 수가 있어요?"라는 말이 피를 토하듯 나오며 화면 밖에 내 가슴에 푹 박힌다. 영화의 배경은 625 전쟁 이후로, 사회의 극단적인 붕괴와 함께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비명으로 사회가 재건되던 때이다. 영화 곳곳에 배치된 무너진 건물들은 당시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명숙과 영호의 대화 사이로 구직하지 못하고 절대적인 가난으로 몰린 젊은 청춘들이 미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을 저 화살 같은 대사로 감독은 관객들에게 날카롭게 보여준다. 한발 더 나아가 감독은 저 둘을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극단으로 몰아간다.



......
[출처]  <오발탄> 한국영상기록원

결국 양공주가 되어 밤거리로 나온 명숙. 밤거리에서 경찰서로 붙들렸다는 동생을 찾으러 온 큰 오빠 철호는 동생을 데리고 경찰서에서 나온다. 경찰서 앞에서 껌 종이를 휙 버리며 명숙은 아무렇지도 않게 껌을 씹는다. 그리고 둘은 꽤 긴 거리를 아무 말도 없이 걷는다. 미안할 필요도 야단칠 이유도 없는, 침묵으로 이어지는 이 거리의 씬은 마치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명숙의 "나는 아무런 죄가 없어!"라는 외침이 당당하게 씹어대는 껌과 화려한 원피스 아래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오빠 철호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걷을 수 있지 않을까.



......
[출처]  <오발탄> 한국영상기록원

둘째 영호는 결국 은해 털이범이 되고 별 소득도 없이 잡히고 동생 영호를 보기 위해 철호는 또 경찰서로 온다. 이곳에서도 철호는 왜 왔냐는, 자신은 목을 매달고 죽기를 바란다는 동생의 말에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철호는 바닥으로 내몰린 동생들 앞에서 무기력한 얼굴로 끝끝내 침묵을 지킨다. 껌을 씹으며 당당하게 걷는 명숙과 불같이 자신의 생각을 내뿜는 영호의 처지가 철호가 지독하게 앓고 있는 치통처럼 속으로 파고드는 고통만 안겨줄 뿐이다.



나는 니 말대로 조물주의 오발탄 인지도 모르겠다.
[ 출처]  <오발탄> 한국영상기록원

철호의 파국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끝이 없다.  전쟁으로 인해 정신을 놓은 어머니는 '가자'만 종일 외치고 있는 상태이고 아내는 아이를 낳다 사망하며 남동생은 감옥에, 여동생은 밤거리에 몰려 있다. 아내가 죽던 날 기어이 앓던 이를 뽑은 철호는 택시를 타고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맨다. 정신을 놓은 어머니가 계신 해방촌으로, 죽은 아내가 있는 서울대학병원으로, 동생 영호가 있는 중부경찰서로 가자고 하던 철호는 정신을 놓은 자신의 어머니처럼 힘없이 '가자'를 외친다. 이에 택시 기사는 자기 갈 곳도 모르는 오발탄 같은 손님이 탔다고 푸념을 한다.



이 애는 곧 웃을 거예요....... 또 웃도록 우리가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어요?
[출처]  <오발탄> 한국영상기록원

위 대사는 철호 아내가 출산을 하다 사망하고 남긴 아이를 보고 명숙이 하는 대사로 이는 곧 감독 유현목이 영화의 마무리로 남기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625 전쟁은 당시 한국 감독들에게 트라우마와 같은 리얼리즘을 선사했고 감독 유현목을 통해 극단적인 리얼리즘이라는 평가를 받는 <오발탄>을 탄생시켰지만, 결국 오발탄 같은 인생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비극 위에 무겁게 올려놓았다. 전후 '상처'와 '재건'이라는 공존하기 힘들지만 공존할 수밖에 없는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 출처]  <오발탄> 한국영상기록원

청계천 다리 밑으로 도주를 하는 영호. 그리고 앞에 목을 매고 죽은 여인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 여인은 등에 아이를 업고 있고 아이는 있는 힘을 다해 울고 있다. 이 장면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영화를 거듭 보면서 남겨진 것은 "저 아이는 죽은 어머니의 등에서 영호 덕분에 살 수 있게 되었다"이다. 삶에 지친 어머니는 더 이상 살아나갈 희망을 찾지 못했고 그러나 아이는 어떻게 할 수 없어 등에 업고 죽은 것이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유현목 감독이 당시 시대의 어떤 비극을 이야기하고 또 그 비극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는지 병원에서 조카를 바라보며 독백했던 명숙의 대사와 오버랩된다.




지금의 시대가 저 강보에 싸여 간호사의 품에서 울고 있는 아기, 그리고 죽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울고 있는 아기와 다름이 없다는, 오발탄의 비극에서 '지금의 풍요'가 잉태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때를 기준으로 보면 미래, 지금을 기준으로 보면 과거가 연결되는 이 장면들을 통해 유현목 감독은 리얼리즘의 힘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며 시대를 뛰어넘어버린 거장임을 손색없이 보여주고 있다.


전후의 상처와 재건. 때문에 당시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흥행을 하지 못한 것이 일견 이해가 된다. 오히려 화려하게 치장되고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의 <서울의 휴일> 같은 영화가 전후 상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대중에게 희망적인 내일로 더 다가올 수도 있었겠다. 영화적 미장센을 눈으로 가득 꿈꾸며 살기 위해, 오로지 살기 위해서 말이다. 반대로 넘쳐나는 풍요로움 속에 공갈빵 같은 빈곤함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이런 극단적인 리얼리즘이 공허함을 매워주는 작품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 


60년이 지나서 봐도 크게 촌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은 것은 현실 반영 위에 수놓아진 명배우들의 열연이 있기 때문인데, 이들은 모두 생계비 수준의 최소 개런티만 받고 무보수로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 이 영화를 접하지 않은 분들은 꼭 한번 봤으면 하는 대한민국 영화 사상,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유튜브를 통해서 간편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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