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해도 나는 글 쓰는 일 같은 건 못 한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일이라는 게 귀찮은 일이기도 하지만, 쓰는 것이 일인 사람이라면 그 번거로운 일을 매일 해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열심히 사서 고생을 해 본 결과, 나는 고생하는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류인 것 같다. 그러므로 당연히 글을 쓸 이유도 없었다. 언젠가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는 작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적지 않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성서 속에 나오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건 아름답다는 말이기도 하고 성스럽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못 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은 못 한다는 문장에는 중요한 단어 하나가 생략되어 있다. 그 단어는 바로 ‘그렇게’ 다. 그렇게의 힘은 꽤나 어마어마하다. ‘나 같은 사람은 못 해’ 라면 나는 못 한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아마 안 할 것이고 그렇다면 정말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 못 해’ 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거기엔 나는 그렇게는 못 하지만, 이렇게는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말을 글 쓰는 일에 대입해 보면 이런 문장이 되겠다. 나 같은 사람은 매일은 못 써. 나 같은 사람이라면 고생을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고생을 싫어하는 사람은 매일은 못 써,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말은 매일 쓰지 않으면 고생스럽지 않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고생은 하지 말자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매일같이 글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그림을 하나 그렸다. 나와 한 약속을 잘 지키느라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귀찮은 날들 중 하나였다. 충분히 아무것도 안 해 지루해질 즈음 문득 길고 길었던 어린 날의 나른한 하루가 떠올랐다. 그럴 때 난 무엇을 했었나. 아이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슥삭이는 동안 어른이 되고 그림이 즐겁지 않았던 이유는 진지하게 작품을 구상하는 일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연습하지 않고) 잘 그리고 싶은 마음도 즐거움을 앗아가지 않았나, 종이 위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 남들에게 뽐낼 수 있는 실력을 원하는 마음도 모두 그림을 그리지 않는 데 저마다 한몫씩 한 건 아니었을까 따위의 생각들을 오고 가며 그림을 그렸다. 어깨에 감각이 없을 때쯤 자세를 풀고 보니 이런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제목은 <어떤 마음>이라고 붙이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글 쓰는 동안 쌓아 올린 쓰는 마음, 즉 이성적인 마음을 내려놓는 일 같다. 이성적인 마음이 떠나고 나면 자연적인 마음이 그 자리를 찾아온다. 이성적인 마음을 시곗바늘의 움직임으로 시간의 흐름을 알아채는 일이라고 한다면, 자연적인 마음은 해의 움직임을 보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아는 일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자연적인 존재다. 그래서 이성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의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나는 고생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자연적인 존재가 시간을 분, 초 단위로 통제하려는 마음에 달달 볶이는 셈이니 고생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성적인 마음이 나쁜 마음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통제하려는 욕구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고생이 생겨나는 것이다.
게다가 이성적인 마음은 연기처럼 형체 없이 존재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을 틀에 가두려는 욕구도 가지고 있다. 자유롭게 흐느적거리며 살아있는 생각들은 글로 변하면서 움직임을 잃고 납작하게 눌리고 만다. 그 장면을 상상할 때면 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물결 속에서 한들한들 살아 움직이던 김이 납싹하게 말라 누운 모습이라니. 마른 김 같은 글들이 한 장 두 장 모여 납작한 나를 이루기 전에 이성적인 마음을 떠나보내야 다시 자유롭고 형체 없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건 새로운 내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두 마음을 오고 가는 일은 계속 글을 쓰는 일이기도 하며 계속 나로 살아있는 일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동안,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저마다 다른 생각들이 모여든다. 모인 생각은 어떤 마음을 만든다. 완성된 마음은 힘을 가진다. 힘을 가진 마음은 이제 제 힘으로 생각을 낳기 시작한다. 그 마음을 떠나보내지 않는다면 점점 거대해지는 마음에 끌려가고 말 것이다. 끝없는 생각의 물결에 휘말려 들고 말 것이다. 이 마음이 나인지, 누가 정말 나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좀 고생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제 힘을 가진 어떤 마음을 떠나보내는 일은 순수한 나로 남기를 택하는 일이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리에 들다가, 어느 날 흐름을 타고 때가 돌아오면 그때 쓰는 마음을 맞이하고 다시 글을 쓰면 된다. 나는 성실하게 글을 쓸 수 없지만 느리게는 쓸 수 있으므로. 느려도 좋다. 아무래도 고생스러운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