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사리 Jul 08. 2023

밝은 별이 밤하늘에 꽃을 그리듯


어른들은 말했다. 대학만 가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얼굴도 더 예뻐질 것이고, 살도 빠질 것이고, 풋풋한 연애도 하게 될 것이라고. 네모난 책상을 하나씩 차지하고 네모난 교실 안에 꽉꽉 들어차서는 꼭 그렇게 네모진 틀에 맞춘 꿈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을 때였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대학은 이상세계였다. 현재를 참고 견뎌야만 가닿을 수 있는 꿈의 세계. 버텨서 살아남은 자에게만 돌아가는 보상이었다. 더 큰 보상을 얻고 싶다면 더 많은 현재를 포기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런 말들 때문인지 일단 대학생만 되고 나면 내가 사는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대학은 새로운 세계일 것이고 거기에서 나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건 환상 속에 살던 내가 믿은 환영이었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수능이 끝나는 날만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국문과에 들어갔다. 국문학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어 시간이 나쁘지 않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국어 시간에 배우던 것들 중에 재미있는 것들이 있긴 했을 뿐이었다. 한시 같은 것들, 그중에서도 무위자연을 노래하고 인생무상을 이야기하는 류의 작품들을 좋아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국문학이 아닌 동양철학을 전공했어야 했던 것 같긴 하다. 예를 들자면 도교 사상이라든가. 그러나 그즈음에 품고 있던 네모난 꿈은 거기까지 생각을 뻗어내지 못했다.   


새로운 세계를 간절히 꿈꾸던 나는 새로운 세계에 주소를 두고 있는 대학에 나를 욱여넣음으로써 그 꿈을 실현하려고 애썼다. 왕복 다섯 시간이 걸리는 통학 거리였으므로, 이론적으로는 새로운 세계이긴 했다. 그러나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와 내가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담겨 있던 익숙한 세상이나 사실은 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국문과에 갔더니 글을  쓰는 학생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다들 나보다는   위인 것만 같았다. 나는 생각 없이 학교만 다니던 고등학생이었는데,  아이들은 나보다 인생을   것도 아닌데 어디서 이렇게 멋진 단어를 배워 오고 심오한 생각을 하는 법을 배웠는지   없는 일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읽은 책이라고는 세계문학  편이 전부였지만,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책을 읽어왔을  애들을 타고난 문학소녀들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렇다면 타고나지 않은 내가 문학을 하지 않는  하나 이상할  없는 이니까. 1학년 1학기에 듣는 문학개론 수업 종강과 동시에, 가능하면 현대 문학과 관련된 수업을  시간표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상관없었다. 그때의 나에게 현대문학이란 난해하기만 하고 재미없는 것이었지만, 다행히도 국문과에서 현대문학만 배우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지금 생각해 보면 국문과에서 배웠던 수업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학기 동안 <<월인석보>> 원문을 읽는 국어학 강독이었던가 하는 이름의 수업이었는데, 어쩌면 정말로 동양철학을 전공했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를 들면 불교 철학이라든가.


버스와 지하철과 걷는 일로 다섯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통학한다는 건 잠자는 시간을 빼고 대중교통에서 하루의 삼분의 일 정도를 보내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 시간이 지루한 것은 크게 문제 되진 않는다. 그동안 책을 읽는다거나 영어 공부를 한다거나 과제를 한다거나 부족한 잠을 잔다거나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뭐라도 한다면 길에 흘려버리는 시간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출퇴근 시간의 지옥철이었다.


얼마간 지옥철에 시달리던 나는, 문제의 퇴근 시간과 겹쳐 수업이 끝나는 날이면 지하철 역 대신 도서관으로 향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편하게 앉아서 책이나 읽다가 퇴근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창가 옆 널직한 책상 앞에 앉으면 금빛 햇살이 책상 위로 길게 들었다. 책상에 내렸던 햇살이 어느덧 손 위로 옮겨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가에서 꺼내온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다. 처음엔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몰라 관심 가는 대로 아나키즘에 대한 책들을 들춰보았고, 그다음으로는 계간지들을 펼쳐서 한국 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계간지에서 본 작가 중 궁금한 작가들의 책을 찾아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는 건 문학소녀들만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에게도 좋아하는 작가라는 게 생긴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 서가에서 찾아온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펼쳤다. 늦은 오후 금빛으로 채워진 열람실에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우유 배달을 하고 사는 성훈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때 나에게 성훈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는 건, 책을 펼치기 전의 나와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내가 달라졌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건 이전과 다른 삶의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한 일이 아니었을까. 나른한 금빛 열람실에서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동안 내 삶에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날의 도서관을 떠올리다가 문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림이 선과 색깔로 종이 위에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고, 음악이 소리를 사용해 공간 속에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일이라면, 문학은 문자를 사용해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입생 때 문학개론 수업을 듣고 생각했던 아름다움이란 굉장히 관습적인 아름다움이었던 모양이다. 나에겐 글을 멋지게 쓰는 학생들이 구사했던 문장도 없고 단어도 없고 감성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을 다루는 일 같은 건 못할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서가를 이리저리 헤매는 동안 세상에는 하나의 아름다움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걸 희미하게나마 보았다고 해야 할까.


지난겨울 혼자 산책을 나선 날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건 알지만 그 아름다운 것들에 나도 포함된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날이었다. 그날 산책길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덤불숲을 헤치며 배를 채우는 덩치 큰 새들도, 커다란 잎 위에 내리는 햇살도, 저만치 멀리서 풀을 뜯는 말들도, 땅바닥에 낮게 붙어 나선형 모양으로 자라는 독초들 마저도.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이, 그러니까 땅 어머니가 만든 존재들이라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날 마주친 새들처럼, 말들처럼, 그리고 식물과 햇살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아름다운 존재라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언젠가 금성이 8년의 주기로 지구 주변을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그린 걸 본 적이 있다. 그 움직임을 선으로 따라가다 보면 놀랍게도 꽃의 모양이 된다. 그걸 보고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지나온 행적도, 앞으로 그리게 될 궤적도 모두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왜냐면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날의 식물들과 새들과 말들이 그런 것처럼 모두 땅 어머니의 아름다운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여전히 멋진 어휘도 없고 그런 어휘를 품을 만한 문장도 없다. 그러나 이젠 내가 글에 담을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안다. 그건 ‘아름다운 의도’다. 글에 아름다운 의도가 담겨 있다면, 그 글이 어둡든, 밝든, 가볍든, 무겁든, 그건 모두 아름다움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건 글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어둠과 슬픔도 모두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건 결국 우리는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는 이야기와 같은 말이다.



금성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꽃.    이미지 출처 | moderndevotee.wordpress.com




작가의 이전글 느리게 쓰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