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여행서로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 오도릭의 <동방기행>를 꼽는다. 이 4대 여행서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시인에게 ‘시적 허용’이 있다면 여행가에겐 ‘여행적 허용’이 있다. 더 멀리 갈수록 더 뻥이 심해진다. 사실 4대 여행서는 실제 작가가 쓴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와 함께 수감된 작가가 받아 적은 것이고, <동방기행>은 오도릭이 임종 직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구술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여행서들은 수백 년 동안 여행서의 고전으로 군림했다. 왜일까? 그것이 여행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흔히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눈’은 ‘아름다운 오해’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거짓말에 환호하고, 타인에 대한 오해에서 자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다.
섬에 가면 다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섬의 시간은 육지의 시간보다 두 배 빠르다. 해의 시계와 달의 시계(물때)가 함께 흐르기 때문이다. 해의 시계에 맞춰 농사도 하고 달의 시계에 맞춰 물질도 해야 한다. 그 바쁜 시간을 바라보며 우리는 일상의 시간보다 더 느리게 간다고 느낀다.
여행객을 맞는 사람에게도 여행은 오해의 집결체다. 제주도지사가 제주도를 자랑하며 1등부터 10등까지 꼽는다면 무엇을 꼽을까? 그 대답 중에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제주도를 찾는 이유 열 가지를 나열한다면, 그중 몇 가지나 겹칠까? 아마 겹치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늘 새롭게 갱신되는 오해다.
여행의 프로를 여행가라 하고 우리는 그들을 지표로 삼는다. 하지만 그들의 여행은 일이다. 그들은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일하러 가는 것이다. 반면 우리의 여행은 일하다 쉬러 가는 것이다. 우리의 여행이 본질이고 그들의 여행은 여행의 탈을 쓴 일이다. 그들의 감동은 상상이고 우리의 감동은 실질이다.
여행은, 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 본질일 수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다. 출국 비행기에서의 설렘만큼 귀국 비행기에서의 안도감도 좋아하게 된다. 우리는 일상을 탈출하러 발버둥 치지만 또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해 초조해한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도시에 길들여져 있다. 우리는 여행에서 위안받고 일상에서 안도한다.
우리는 캠핑을, 도시를 떠나서, 자연으로 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캠핑의 본질은, 도시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불멍만큼 물멍(샤워)도 좋아한다. 자연을 보러 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돌아올 도시를 확인하는 일이 캠핑이다. 그래서 캠핑을 갈 때 얼마 큼의 도시를 가져갈지 고민한다. 그것은 전기장판일 수도 한 잔의 드립커피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오해’라는 여행의 본질은 돌아올 일상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여행이라는 이탈로 일상에서의 일탈을 억제한다. 여행이 설렐 수 있는 것은 돌아올 일상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일상의 존재 이유가 된다. 돌아온 일상이 없는 여행은 불행한 망명이다. 그때의 심정은 설렘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두려움이다.
우리에게 여행이 필요한 이유는 일상은 수단이고 여행은 보상(결과)이기 때문이다. 일상은 행복을 위한 준비지만 여행은 구체적인 행복의 쟁취다. 고로 여행이 없으면 일상이 무의미 해진다. 여행 계획은 구체적일수록 좋다. 목표가 구체적이어야 실천 또한 구체적일 테니.
여행을 둘러싼 이런 역학은 여행이 ‘아름다운 오해’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일상의 부대낌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자신의 생각대로 오해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진실이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진실이 있다고 믿고 싶어서 여행하는 것이다. 여행불가 시대에 문득 여행의 가치를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