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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Dec 24. 2020

기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던 영화

정치는 지적 수준, 언론은 양심 수준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2016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각본상을 받았다.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스캔들을 폭로한 보스턴 글로브의 탐사보도팀을 실제 모델로 한 이 영화는 기자들이 진실을 밝혀나가는 과정을 덤덤하게 묘사했다. 국내에서는 별 반향이 없었던 작품이지만 기자였던 나에게는 울림이 컸다.


이명박근혜 시절 방송 독립을 했던 언론인들과 현재 집권하고 있는 정치인들의 결이 비슷한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 안희정 박원순 관련 사건에서 관건이 되었던 성인지 감수성 관련 이슈와 조국 전 법무부장관 관련 보도가 생각난다. 현 정부 관련 이슈에서 이들이 주도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면서 팽팽한 긴장을 조성했던 사례가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듣기로 이런 이슈에서 파업했던 선배 세대와 그 이후 세대의 언론사 내적 갈등이 더 컸다고 했다.


스포트라이트를 어디로 어떻게 비추느냐가 중요하다. 지금 언론에서 현정부 관련 이슈를 보면 보수 언론이 지리멸렬한 이슈의 말꼬리를 붙들고 있는 양상이다. 그런데 이건 이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파업했던 언론인들이 현정부와 건강한 긴장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문제제기를 해야 대승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지금은 그저 지지부진이다. ‘우리는 달랐다’는 세력이 ‘우리는 다르다’라는 걸 증명하도록 채찍질 해야한다.


<스포트라이트>는 천재가 아니라 둔재들이 등장한다.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도 천재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둔재들의 끈기다. ‘특종’은 운의 산물일 수도, 용기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집요함’의 산물이다. 그런 ‘집요함’이 영화에서는 ‘지루함’이 되기 쉽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는 집요하게 구성해서 극적 긴장감을 잃지 않고 관객을 기사 마감까지 끌고 갔다. 관객은 함께 특종을 취재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주인공들과 함께 하나하나 과제를 풀어간다.

좋은 기사는 부사와 형용사에 의지하지 않는다. 오직 주어와 술어로 말할 뿐이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도 바로 그런 ‘절제미’다. 기자의 노력을 과장하지도 않고 외부의 압력을 확대 해석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절제되어 있지만 충분히 주인공들의 고뇌를 표현해 낸다.

영화에서는 ‘악의 절대성’마저도 절제되어 있다. 오히려 ‘악의 평범성’을 그리고 있다. 악은 결코 악마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세련된 모습을 하고 다가온다. 때로는 친한 친구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의 언어는 현란하다. 그들은 악이 일탈이 아니라 악을 까발리는 것이 일탈이라고 경고한다.

좋은 기자는 겉으로 드러난 문제가 아니라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해 내는 능력을 가진 기자다. 언론자유가 가장 보장된 나라로 손꼽히는 미국에서 언론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가 한국과 같은 언론 후진국이었다면 다른 위협요소가 있었겠지만 미국에서는 다르다. 영화는 그 차이를 정확히 반영하면서도 절대악을 소환해낸다.

악은 마음속에 있다. 기자는 어느 정도 반열에 오르면 ‘주류의 일원’으로 초대를 받게 된다. 그 '주류의 맛'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은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셈이다. 자신의 ‘사회적 관계’ 혹은 ‘향후 행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천직의식’이 필요하다.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었다.

신사의 언어를 쓰는 악으로부터 유혹을 받을 때마다 기자들은 질문을 던진다. 인상적인 것은 기자들이 마지막 말이 늘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더 멋진 말을 던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마지막 말은 늘 질문이다. 기자가 나누는 대화의 본질은 멋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시위한다. 진실을 찾는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는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는 특히 기자들에게 의미가 남다른 영화다. ‘좋은 기자가 되고 싶게 만드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미 기자이거나, 기자가 되려고 하거나, 좋은 기자를 보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다. 한국영화에서의 기자는 다르다. 기자가 주인공인 최근의 한국영화들은 ‘나쁜 기자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특종: 량첸 살인기>,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돌연변이>에 기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모두 우리 언론의 폐단을 꼬집는다.



<특종:량첸 살인기>의 보도국장은 “뉴스란 게 그런 거잖아.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 가려내는 거 그거 우리 일 아냐. 보는 사람들 일이지”라며 언론의 책무를 시청자에게 떠넘긴다. 세 영화에서 기자들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취재현장에 뛰어들고 반칙을 일삼는다. 논설위원이 강력한 조연으로 나온 <내부자들>에서는 진실을 왜곡해 여론을 농락하는 주역으로 묘사했다.

그나마 한국 기자들의 체면을 살려준 영화는 <섬. 사라진 사람들>이었다. ‘염전 노예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무관심, 무책임, 이기주의, 탐욕’ 속에 잊힌 사건을 기자들이 파헤치는 모습을 담았다. 반면 이 영화는 미디어를 통해 대형 사건을 접하는 대중이 어떤 방식으로 사건과 접하고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소비하는지에 대해 담았다.

정치가 그 나라 국민들의 지적 수준을 보여준다면 언론은 그 나라 국민들의 양심 수준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영화에서 언론이 이렇게 그려지는 것은 1차적으로는 기자들의 책임이다.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기자들이 취재현장에서 직업의식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 사회의 양심이 바로 서지 않은 것도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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