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억3000만의 신을 섬긴다는 네팔, 히말라야의 날씨는 신의 수만큼이나 변화무쌍했다. 해발 3870m 캉진곰바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니링 게스트하우스의 4층 식당에서는 랑탕 계곡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잔 뒤 올라가 보니 계곡 아래쪽으로부터 눈보라가 올라오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던 곳이었다.
눈보라가 계곡 밑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모습이 신기해 동영상으로 담았다. 문득 빙하 쪽으로 산책을 나간 일행의 안부가 궁금했다. 아직 안 내려왔다고 했다. 네팔인 가이드 벅타 씨와 함께 갔지만 걱정이 되었다. 한국인 가이드 파상(심재칠) 씨가 일행을 찾아 나갔다고 했다. 걱정이 커졌다. 곧 해가 질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빙하 쪽을 올려다보는데 두 명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가이드 파상과 일행 한 명이 되돌아왔다. 파상은 나머지 일행을 데려오겠다며 다시 빙하 쪽으로 올라갔다. 날은 이내 어두워졌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 파상의 위성전화번호를 주고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신호가 가지 않았다. 돌아오지 못한 일행 중에는 고소증을 호소한 이도 있었다. 일행은 눈길에 필수적인 아이젠과 스패츠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데드라인을 오후 8시로 잡았다.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긴급 구조요청을 하기로 했다. 그때 멀리서 불빛 하나가 빠르게 내려왔다. 구조를 나갔던 키친팀 팀장 나왕 씨였다. 일행의 안부를 묻기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 “식사는요?” 직업의식이 돋보였다. 그는 일행이 내려오는 데 한 시간쯤 더 걸릴 거라고 했다. 무전기를 건네주고 가는 그의 뒷모습이 텐징 노르가이(에드먼드 힐러리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셰르파)처럼 듬직해 보였다.
40분쯤 뒤에 일행과 일행을 구하기 위해 올라간 키친팀 스태프가 모두 내려왔다. 일행은 탈진해서인지 괜찮으냐는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다. 고도 4000m 이상인 곳에서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겨울밤에 조난을 당할 뻔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안전한 길을 찾다가 눈이 허리까지 빠지는 곳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고 했다.
극심한 고소증도 우리 일행을 괴롭혔다. 3000~4000m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고소증이 오기 마련인데 정도가 심한 일행이 몇 명 있었다. 추위 때문에 난로를 피운 식당에 모여서 불을 쬐었는데 그것이 산소포화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산소포화도와 맥박 수를 수시로 체크했다. 나흘간 폭설로 고립되어 산소포화도가 떨어진 상태가 오래 지속되니 고소증이 심해졌다. 일행 중 세 명이 심각한 상태까지 갔다. 한 명은 밤새 산소통을 틀어놓고 자야 할 정도로 증세가 심했고 두 명은 쇼크를 겪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랑탕을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했다. 랑탕 트레킹 코스는 안나푸르나·에베레스트와 함께 히말라야 3대 트레킹 코스로 꼽히는 곳이다. 대체로 안나푸르나 코스는 다채롭고, 랑탕 코스는 아름다우며, 에베레스트 코스는 웅장하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랑탕 지역은 2015년 네팔 지진 피해가 집중된 곳으로 여행자가 많이 줄었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보통 우기가 오기 전인 3~4월과 우기가 끝난 뒤인 9~11월이 성수기다. 12~2월은 비수기인데 ‘코리안 성수기’로도 불린다. 이 시기에 유독 한국인이 많이 찾기 때문이다. 겨울이지만 위도가 한국보다 낮아서 밤에는 춥지만 낮에는 늦봄 혹은 초가을 정도 날씨다. 이때는 건기여서 하늘에 구름이 거의 없어 설산을 조망하기에 좋다. 다만 일교차가 커서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
2016년 총선 뒤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려던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 염두에 둔 곳은 안나푸르나 코스였다. 안나푸르나가 아닌 랑탕으로 트레킹 코스를 바꾸자고 한 사람은 우리의 네팔인 가이드 벅타 씨와 한국인 가이드 파상이었다. 이들은 랑탕 피해 주민들과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2015년 지진이 났을 때 자신들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마야거르추를 랑탕 지역 지진 피난민에게 개방해 50여 명이 그곳에서 생활했다. 랑탕 지역에 지진 피해가 많았다며 피해 복구를 위해 이곳을 걸어달라고 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흔쾌히 수락했다. 피해 주민들이 이용했던 마야거르추 게스트하우스에서 문 대통령은 트레킹 일정을 시작했는데 우리도 똑같이 했다.
랑탕 트레킹을 하기 전 문재인 대통령은 지진 피해를 입은 아루카르카 마을을 방문했다. 지진으로 학교가 무너져 아이들이 임시 교사에서 수업을 받는 곳이다. 문 대통령은 마을 주민과 학생들을 위로하고 복구를 위해 후원금을 기탁했다. 우리 일행도 이 학교를 방문해 크리켓 운동기구 2세트와 축구공 10개, 그리고 치약과 칫솔 세트 200개를 기증했다.
우리 일행은 마을에서 민박을 했다. 아이들을 카트만두에서 공부시키며 부모를 모시고 사는 부부의 집이었다. 부엌에서 함께 소박한 달밧(넓은 그릇에 밥과 채소가 담긴 네팔 전통 음식) 한 그릇을 먹으며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네팔 민가 체험은 흔하지 않은데 이번 여행을 기획한 가이드 벅타 씨가 네팔 농촌 부흥을 위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일이다. 벅타 씨는 이런 민가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해 네팔 관광청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랑탕 트레킹을 할 때 아루카르카 마을에서 민박을 하면 이점이 있다. 보통은 카트만두에서 샤브루베시까지 하루 종일 차로 달려 이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그런데 아루카르카 마을에서 1박을 하면 시간 여유가 있어 샤브루베시 (1460m)를 지나 캉짐(2235m)까지 차로 가서 트레킹을 시작할 수 있다. 캉짐은 샤르부베시보다 고도가 800m 정도 높은 곳이라 첫날 트레킹이 훨씬 수월해진다. 고산 트레킹에서는 계곡에서 트래버스(횡단 등반)까지 오르는 구간이 가장 힘든데 이를 피할 수 있다.
고도보다 중요한 것은 트레킹 중에 볼 수 있는 경치의 차이다. 샤브루베시에서 출발하면 내내 랑탕 계곡길을 걸어야 해서 우렁찬 물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키 큰 교목에 풍경이 가린다. 하지만 캉짐에서 출발하면 산 중턱의 트래버스를 걷게 되어 계곡 맞은편에 설산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둘째 날 걷게 된 라마 호텔 (2470m)에서 랑탕 마을(3430m)까지 구간은 매우 힘든 코스였다. 거리가 12㎞로 가장 길고 시작점과 종착점의 고도 차이도 1000m 가까이 되기 때문이다. 초반 계곡 길을 벗어나면 평탄한 길이 곧 나오기 때문에 수월하게 걸을 수 있다. 고산 트레킹을 할 때는 ‘게으름뱅이처럼 오르고 겁쟁이처럼 내려가라’는 격언이 있다. 한국에서 산을 오르던 습관 그대로 걸으면 고소증이 오기 쉽다. 자주 쉬어야 한다. 전면에 랑탕리룽(7227m)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랑탕 마을은 2015년 지진 때 가장 많이 피해를 본 지역이다. 산사태로 마을이 통째로 매몰되어 243명이 실종되었다. 이중 175명은 마을 주민, 27명은 가이드와 포터, 41명은 외국인 여행자였다. 네팔 정부는 매몰된 마을을 방치했다. 마을이 있던 곳은 채석장처럼 돌밭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트레킹 길을 냈다.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매몰된 마을 위를 걷게 된다. 매몰 지역이 끝나는 곳에 초르텐(불탑)이 있는데 그 옆에 새로운 랑탕 마을이 조성되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더 잤다.
셋째 날 걸은 랑탕 마을-캉진곰바 (3870m) 구간의 트레킹은 거리가 6㎞ 정도로 수월한 편이었다. 한나절 거리여서 캉진곰바 마을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전날 위풍당당한 모습을 자랑하던 랑탕리룽이 깎아지른 벼랑 위에 살짝 보이는 길을 걷다 보면 전면에 흰 도포를 펼친 듯한 캉첸포(6378m)를 마주치게 된다. 캉첸포 오른쪽에 있는 산군의 풍경이 이채로웠다.
캉진곰바 마을에는 다층 건물이 제법 있었는데 얼핏 스위스의 산촌처럼 보였다. 일행은 캉진곰바 니링 게스트하우스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각자 휴식을 취했다. 체력을 회복해서 다음 날 캉진리(4773m)나 체르코리(4984m) 등정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언급한 야간 조난 상황을 겪으며 캉진곰바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마을의 발전기 고장으로 전기가 끊기며 인터넷도 안 되고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었다. 위성전화 한 대가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처음 눈이 내렸을 때는 다들 체르코리와 캉진리에 오르지 않을 ‘그럴듯한 핑계’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눈을 치우거나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고 야크 떼를 따라 마을 산책을 하기도 하며 고산에서의 일상을 즐겼다. 키친팀 멤버들의 사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나왕의 친척인 키친팀은 일용직 노동자부터 박사과정 대학원생까지 출신이 다양했다.
우리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한 벅타 씨는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일할 때 욕부터 배우며 한국 생활을 시작했는데, 힘든 와중에도 외국인 노동자 인권 운동에 동참했다. 그는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고 했다. 네팔 시민단체 중에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뒤에선 지원금을 착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 시민단체들이 설립 목적에 맞게 활동하는 걸 보고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다. 네팔에 돌아가면 시민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돌아온 그는 이를 실행했다.
네팔인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들으며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잠이 들었는데 이튿날도 헬기는 오지 않았다. 오히려 눈보라가 더 강해져 있었다. 시야가 모두 가려지는 ‘화이트 아웃’도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고소증이 심한 사람의 절망감은 더 컸다.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고소증은 등산화 끈을 묶을 때, 급하게 계단을 오를 때 도둑처럼 찾아오곤 했다.
다음 날도 하늘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전날 만든 눈사람이 파묻힐 정도로 눈이 많이 왔다. 히말라야가 왜 히말라야(눈의 고장)인지 알 것 같았다. 모두가 지친 가운데 응급 환자가 또 한 명 발생했다. 환자를 눕히고 대여섯 명이 함께 응급조치를 했다.
주네팔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했다. 위성전화를 이용해 고립된 한국인 36명의 명단과 나이를 문자로 전해주었다. 한국인 여행자들은 외부와 통신이 어려워 항공편 취소와 연장을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 상황을 대사관에 알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서 창밖을 보았다. 별이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반짝거렸다. 옥상에 올라가 장엄한 히말라야의 일출을 볼 수 있었다. 거산을 보며 얻는 ‘다르샨’(신에게 다가가거나 신을 바라보는 것)이 이 느낌이 아닌가 싶었다. 날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쾌청했다. 다행히 아침 8시 무렵 첫 헬기가 왔다. 소형 헬기라 6명씩밖에 탈 수 없었는데 마지막 8번째 헬기에 탑승하니 낮 12시 30분이었다.
직접 가서 보니 네팔 지진 이후 네팔의 3대 트레킹 코스 중 랑탕 쪽만 아직 회복이 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코리안 성수기’ 임에도 문을 닫은 게스트하우스가 많았다. 카트만두의 대표 여행자 거리인 타멜(Thamel) 거리의 기념품 상점에서도 랑탕 기념품은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랑탕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특히 나흘 동안 고립된 뒤 헬기로 하산하며 본 설산 풍경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고대 인도의 시인 칼리다시가 말한 ‘눈의 왕관을 쓴 산의 제왕’을 보았다. 그 모든 어려움을 겪고도 그곳이 그리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