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가 올레라는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올레는 우리에게로 와서 길이 되었다. 제주의 길은 올레라는 이름을 붙여주기 전이나 후나 변함없지만 그 이름을 붙인 뒤로 사색과 힐링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명성은 바다 건너에도 전해져 ‘규슈올레’라는 이름으로 수입되었다.
규슈올레 전체 15코스 중 7코스를 걸었다. 그리고 <시사IN>의 규슈올레 부록 제작을 총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옛길과 숲길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졌다. 규슈올레의 원조인 제주올레나 지리산둘레길과 비교해 보기도 했다. 일본의 길은 우리의 길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장점과 단점이 서로 달랐다. 그리고 일본의 길에 대한 관심이 나를 나가노현 키소지역으로 이끌었다.
나가노현 키소지역은 일본 중앙알프스에 속하는 곳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 영월이나 정선 어디쯤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산골이지만 영월처럼 물이 풍부하고 정선처럼 천연림이 잘 보전되어 있다. 그곳에서 일본의 옛길과 숲길을 걸었다. 일본 중앙알프스는 보통 일본알프스 고봉을 오르기 위해서 가거나 겨울에 스키를 타기 위해서 가는 곳이지만 봄 산책로로도 충분히 좋았다. 아니 최고였다.
키소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나고야 공항에 내려서 일본 남알프스와 중앙알프스 사이의 계곡길을 지나게 되는데 이 길이 절경이었다. 저 멀리 설산이 보이고(5월 중순인데도 정상 부분에는 아직 눈이 남아 있었다)…. 계곡은 깊고 유량이 풍부했다. 물 색깔이 진한 것이 일본 가루녹차(말차) 색깔 같았는데 스위스 알프스의 계곡길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비슷했다.
일본의 숲은 우리 숲보다 울창하다. 나무가 곧고 높다. 토양의 유기질이 더 풍부하고 강수량이 많기 때문이다. 숲이 울창하기 때문에 물을 잡아주는 능력도 좋아서 전반적으로 계곡의 유량이 풍부하다. 하지만 산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일본 숲의 장점이 단점이 되기도 한다. 조망이 잘 열리지 않기 때문에 숲길만 걸으면 지루할 수 있다. 이끼가 많아 신비롭기도 하지만 들꽃 같은 것은 적은 편이다.
2박3일 동안 키소 지역에서 4개의 트레킹 코스를 걸었는데 이곳은 이런 일본 숲의 단점은 적고 장점은 더 큰 곳이었다. 4개 코스 중 2개 코스는 이미 1년 전에 여행상품 개발 전문가들과 걸었던 길이다(마고메주쿠-츠마고주쿠 나가센도/ 아카사와 자연휴양림). 이번에 새로 걸은 길은 미즈키사와(水木澤)천연림과 나가센도 중 나라이주쿠 구간이었다. 두 길은 지난해 걸었던 길을 보완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길에 대한 소회는 이랬다.
# 나가센도(마고메주쿠-츠마고주쿠 구간)
나가센도(中山道)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에도시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길이다. 에도로 향하는 5개의 주요도로-고카이도(五街道) 중 하나로 주로 다이묘(大名 제후)들이 쇼군(將軍)이 있는 에도에 ‘참근교대(参勤交代, 다이묘들이 2년에 1년 씩 에도에서 복무하는 것)’를 갈 때 이용되었다. 특히 나가센도는 도카이도(東海道)와 함께 천황이 있는 교토와 에도를 연결하는 곳으로 천황가의 황녀가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에게 시집갈 때 이용한 길이기도 하다(조선통신사는 해안을 따라 난 도카이도를 이용했다).
에도시대 나가센도에는 총 69개의 역참마을이 조성되었는데 그중 마고메주쿠-츠마고주쿠 구간(약 8km)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꼽힌다. 그래서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일본 옛길을 걸을 때 대부분 이곳으로 온다. 마고메주쿠는 언덕 위에 조성된 역참마을로 전망이 좋고 츠마고주쿠는 일본의 중요전통건조물군보존지구(重要伝統的建造物群保存地区)에 첫 번째로 지정된 곳으로 옛 건물들이 잘 보전되어 있다. 이곳은 자치규약으로 옛집에 대해서는 ‘부수지 않는다. 팔지 않는다.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했다.
마고메주쿠-츠마고주쿠 구간의 고개는 800미터 정도 된다. 양방향으로 모두 걸어보았는데 대체로 마고메주쿠 구간은 그늘이 적고 츠마고주쿠 구간은 그늘이 많다. 해가 강하게 비칠 때는 츠마고추쿠 구간을, 해가 약할 때는 마고메주쿠 구간을 걷는 것이 좋다. 고개 아래에 옛 가옥을 그대로 사용하는 휴게소가 있는데 마을 어르신이 자원봉사자로 나와서 차를 내려준다(운이 좋으면 일본 민요도 들을 수 있다).
# 미즈기사와 천연림(일본 원시림)
일본이 자랑하는 원시림, 미즈기사와 천연림은 ‘숲길의 이데아’라 할만한 길이다. 이 길은 날씨 때문에 우중 산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행들은 ‘그래서 더 좋았다'라고 했다. 비와 안개가 숲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해주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태고의 숲'이라 부르는 이곳은 야쿠시마에 버금갈 정도의 천연림을 자랑하는 미즈기사와 천연림에는 기소강(木曾川)의 발원지도 있다.
미즈기사와 천연림은 눈 코 입 귀 발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트레킹의 이데아’와 같은 곳이다. 천연림을 따라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여기서 중앙알프스의 고봉들을 조망할 수 있다. 길을 걸을 때는 원시림의 상큼한 내음을 맡으며 경쾌하게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상쾌하게 걸을 수 있다. 딱딱한 바위나 인위적인 나무 데크가 아닌 낙엽이 켜켜이 쌓인 길이라 발바닥도 그리 아프지 않다.
일행들은 대부분 이번 여행 최고의 길로 이 길을 꼽았다. 일단 길의 커브가 좋았다. 제주도 오름의 유려한 곡선처럼 계곡과 능선을 타고 등산로가 맵시 있게 나 있었다. 수종의 구성도 다양했다. 일본 숲은 삼나무 일색이어서 단조롭다. 그런데 이 숲은 삼나무와 편백나무와 같은 침엽수는 물론 일본 칠엽수나 당단풍 너도밤나무와 같은 활엽수도 많았다. 짧은 순환코스와 긴 순환코스가 있어서 골라 걸을 수 있다.
# 나가센도(나라이주쿠 구간)
나가센도, 나라이주쿠 구간은 이번에 걸었던 길 중 가장 인문적인 길이었다. 문화해설사가 동행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일본의 문학과 역사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정상부에서는 하이쿠(俳句) 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해발 1200미터인 도리이토게 쉼터에 그는 ‘종달새보다 높이 있는 언덕'이라고 남겨 놓았다. 천재시인의 기지 넘치는 표현력에 탄복했다. 전국시대 영웅 중 한 명인 다케다 신겐의 부대가 대패해 2000명이 전사한 골짜기도 있었다.
나가센도에서는 관음상 위에 말의 머리를 얹은 마두관음상을 자주 볼 수 있다. 나가센도에서 죽은 말을 기리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통념은 ‘소가 가장 우직하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말이 더 우직하다고 했다. 주인의 채찍질에 자기 몸의 상태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몸이 부서질 때까지 달리다가 쓰러지면 죽고 만다는 것이었다. 2~3km에 하나씩 이런 마두관음상을 볼 수 있었다. 길을 걷다가 멧돼지가 캐 놓은 칡뿌리를 길에서 발견했는데 이 칡뿌리를 마두관음상 앞에 놓아두었다.
나가센도를 걸으면 일본인들보다 외국 관광객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그 길에 ‘서구인이 보고 싶은 일본의 모습’이 있어서겠지만 그 옛날 그토록 길을 걸었던 일본인들이 왜 트레킹에 무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도시대 트레킹 강국이었던 일본이 오히려 우리로부터 ‘제주올레’를 수입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인들이 알지 모르는 ‘길맛’을 누리는 듯해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 아카사와 자연휴양림(편백나무 숲길)
아카사와 자연휴양림은 한마디로, '숲의 이데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숲에 가서 보고 싶은 풍경, 느끼고 싶은 공기, 만끽하고 싶은 기분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가을에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는데 5월 초에는 대체로 한가했다. 이 숲에는 히노키를 비롯해 측백나무와 금송 등도 두루 분포하고 있다. 1급수 강에 비교할 수 있는 1급림 지역이었다. 삼나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잎이 덜 무성하고 간벌을 해서 간격이 넓었기 때문에 나무 사이로 햇살이 쪼개지는 장관도 볼 수 있다.
아카사와 자연휴양림은 에도시대부터 일본 도쿠가와 쇼군가 관리하던 곳으로 천황가의 직할 신사인 이세 신궁의 개보수에 사용하는 히노키(편백나무)를 기르던 곳이다. 에도시대부터 조림을 해온 곳이라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많다. 나무에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삼나무에 비해 히노키(편백나무)는 더 단단하고, 물에 강하고, 향기가 나서 병충해에 강하다. 흔히 말하는 피톤치드의 제왕이라서 삼림욕에도 최고다.
아카사와 자연휴양림은 일본의 3대 아름다운 숲, 일본 삼림욕의 발상지, 21세기 남기고 싶은 자연 100선, 삼림욕 일본 100선, 향기로운 풍경 일본 100선, 국가 산림테라피기지 등등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숲이다. 별도의 수식어가 필요 없다. 코스 중간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지난해 화산 폭발한 온다케를 조망할 수도 있다.
아카사와 자연휴양림에는 총 8개의 산책코스가 있다. 코스 길이가 보통 2~3km 정도여서 전체를 합쳐 20km가 조금 넘는다. 이번 여행에서는 무카이야마 코스(3코스)-나카다치 코스(4코스)-코마도리 코스(2코스)의 일부-쯔메타자와 코스(5코스)-카미아카사와 코스(6코스)의 순서로 걸었다. 코스는 대체로 관리 사무실을 중심으로 꽃잎 모양으로 퍼져 있어서 걸을 수 있는 시간에 맞춰서 더 걷거나 덜 걸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