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그 길을 걸어야 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수많은 산티아고 순례길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당연히 이 길을 걸어야 하는 것처럼, 그 길에 모든 감동과 깨달음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왜 그들은 길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었다.
한국인들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험범위는 셍쟝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르는 800km 길이다. 다른 길은 시험범위에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 프리퀄’을 기획할 때 나 또한 이를 전제로 기획했었다. 그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워밍업 여행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일단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는 여행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체 숙소를 예약해서 독점하는 것도 맞지 않고, 사람들이 보조를 맞춰서 걷는 것도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전에 5일 정도 산티아고 순례길 시작 전 프랑스 소도시를 함께 답사하고 시작 구간을 이틀정도 함께 걷는 것으로 기획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길'의 프랑스 구간에 있는 소도시들을 답사하고 인근 구간을 걸어 보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프랑스길의 프랑스 구간을 걷지 않고 셍쟝에서 시작해서 스페인 구간을 주로 걷는다. 그런데 이 길은 프랑스 구간도 있었다. 두 구간을 비교하면 프랑스 구간이 훨씬 순례자에게 적합한 길이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프랑스길의 스페인 구간만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순례길의 종점인 것은 맞지만 셍쟝이 시점이어야 하는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셍쟝은 프랑스길의 ‘중간 지점’ 일뿐이다. 그러므로 셍쟝에서 시작하는 것은 완주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 내 생각인데, 왜 여기가 시작점으로 간주되는지 알고 싶다).
프랑스길의 시작점은 르퓌이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왜냐면 북유럽에서 내려오는 순례길, 체코 등 동유럽을 넘어온 순례길, 스위스에서 알프스를 넘어온 순례길이 합쳐지는 지점이 바로 르퓌이이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이 가리비인데 이 가리비 모양은 다양한 곳에서 온 길이 한 지점(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을 소실점으로 하는 것을 표상한다. 그런 면에서 르퓌이는 분명한 가리비의 소실점이다. 따라서 프랑스길의 출발점으로 상정할 수 있다. 셍쟝은 프랑스길의 출발점이 아니라 중간지점이고.
이왕 중간에서 할 것이라면, 셍쟝이라는 중간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첫 스페인 기점도시인 팜플로나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맞다고 본다. 왜냐하면 셍쟝에서 시작하면 바로 거친 피레네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이건 트레킹이 아니라 하이킹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초보자에게는 쉽지 않은 코스다(그래서 초반 포기자가 많이 나오는 듯).
답사를 하고서 '산티아고 순례길 프리퀄' 기행을 포기한 이유는 프랑스길의 프랑스 구간을 함께 걷고 스페인 구간을 혼자 걷게 하는 것은, 여행감독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포기하기로 했다. 이유는 이렇다.
프랑스 구간이 훨씬 순례자의 길 답기 때문이다. 조용히 사유하며 걸을 수 있다. 프랑스 구간에서 일주일 동안 만난 순례자만큼을 스페인 구간에서는 불과 십 분 만에 다 만났다. 마치 ‘순례자들의 행군’을 보는 듯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행군하는 것이 아니라면 프랑스 구간을 더 추천한다.
사람들이 시작도시로 여기는 셍쟝은 북한산 아래와 다를 바가 없는, 번잡한 관광도시였다(정말, 잔치국수를 파는 집도 있었다). 그리고는 박압 때문에 손상된 길을 보수한 것인지 파쇄석을 깐 길을 내내 행군한다. 도중에 북한산을 오르는 건가 하고 착각을 할 만큼 한국 사람 또한 많았다.
이번 답사를 하면서 든 가장 큰 의문은, ‘왜 산티아고 순례길을 칭송하기만 할 뿐, 아무도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였다. 이 길이 사람들에게 순례가 되는 길이 맞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왜 없었을까. 이 길을 그저 걷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지만 이 길에 대해 말하는 자라면 이 질문을 한 번쯤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순례자에게는 중요한 이유가 아니겠지만, 프랑스 구간 풍광이 스페인 구간보다 월등하다는 부분도 포기한 이유다. 이런 아름다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단조로운 능선을 내내 걸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어차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러 걷는 것이지 상관없을까? 여행 기획자의 입장에서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론은? ‘산티아고 순례길 프리퀄’은 용도 폐기다. 여행감독으로서 내가 할 일은 ‘당신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하고 질문을 던지게 할 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이런 사정을 알리고 나만의 시작점을 잡아보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여행감독에게 맞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헛된 답사는 아니었다. 이 길을 따라 형성된 프랑스 소도시들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두 개의 여행을 파생하기로 했다. 하나는 ‘남프랑스 소도시 기행’, 다른 하나는 ‘프랑스-스페인 소도시 기행’ 봄과 가을에 하나씩 나눠서 진행하려고 한다. 한 도시 한 도시가 매력적이어서 계속 다음 도시를 설렘 속에 기대하며 걸었다. 길을 포기한 대신 새로운 길을 얻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