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재열 여행감독 Aug 19. 2021

일상은 본캐로, 여행은 부캐로

여행감독의 생애 전환 기술 제1편


방송인 유재석의 MC로서 도드라진 장점은 출연자의 캐릭터를 잘 잡아준다는 점이다. 캐릭터가 생기면 존재감이 생긴다. 존재감이 생기면 역할을 부여받는다. 역할이 있으면 시청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유리하다. 그가 출연자의 캐릭터를 잘 잡아줄 수 있는 비결은 남다른 관찰력이고 그 관찰력은 인간에 대한 애정에 기인한다.


여행감독도 비슷한 역할을 요구받는다. 여행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여행감독은 그들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한다. 이때 여행자들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중요하다. ‘여행에서 만난 사이’라는 것을 환기시켜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사회에서 만나는 숱한 비즈니스 미팅에서처럼 상대방을 대한다. 되도록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은 본캐(본래 캐릭터)가 아니라 부캐(또 다른 캐릭터)로 여행자들을 소개한다.



 50대 초반의 게임회사 CEO인 김아무개는 ‘운전병 김C’로 소개한다. 50대 후반의 건축사 송아무개는 ‘바비큐 꿈나무’로, 50대 초반의 배우 류아무개는 ‘나무꾼 캠퍼’로, 제주도의 마을발전위원 김아무개는 ‘한라산 계곡 가이드’로 소개한다. 그들의 본캐가 아닌 부캐다.


비즈니스가 아닌 여행에서 우리는 굳이 상대방의 전부를 알 필요가 없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일면만 봐줘도 충분하다.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진정한 자신’은 단 하나라는 ‘개인주의’ 사고방식이 인간관계 모순의 원인이라며 사람들은 상대나 상황에 따라 ‘가면을 쓴 여러 가지 모습의 자신’을 보여준다며 ‘분인주의’를 주창한다. 여행은 이런 ‘분인주의’가 적용되는 좋은 예다.


처음 만나는 중년은 대부분 명함부터 꺼내 든다. 명함은 과거의 총체로 자신의 사회적 본캐를 드러낸다. 여러 말할 필요 없이 자신을 요약해주는 명함을 들이밀며 이에 합당한 대우를 기대한다. 하지만 여행에서 이런 명함은 TMI(too much information)로 불필요한 선입견만 줄 수 있다. 여행팀이라는 샐러드를 만드는 데에는 과일 조각을 넣는 것으로 충분하다. 굳이 과일나무의 생김새까지 알 필요는 없다.



여행에서는 여행에 필요한 만큼만 서로 알면 된다. 여행자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간략한 자기 서사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인데, 나름 기자생활 20년 노하우가 담긴 질문이다.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 내 인생의 변곡점, 이 여행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 여행 친구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정도 정보만으로도 여행에서는 충분하다.


‘본캐’가 과거의 총체라면 ‘부캐’는 미래의 상상력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년은 자신의 ‘부캐’를 내놓지 못한다. 그런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부캐’가 없는 것은 인생을 어떻게 누리고 살겠다는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캐’를 가지면 인생을 두 번 사는 일이 되는 것이라며 함께 찾아준다.


‘부캐’를 억지로 만들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오래된 미래’다. 자신 안의 소년 혹은 소녀를 꺼내면 거기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여행의 묘미는 시간을 역주행하는 것으로 자신 안의 소년과 소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이 만남에 성공하면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자아, ‘부캐’를 얻을 수 있다. 중요한 생애전환 기술 중 하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