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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Aug 18. 2021

김명곤의 광대론,"우리 시대최고의 광대는 김제동"

김명곤 전 장관은 김제동을 ‘왕의 남자’의 공길로 보았다



기자에서 독일어 교사로, 소리꾼으로, 민중 연극 연출가로, 영화배우로, 문화예술 경영자와 고위 공무원으로, 다양한 직업을 거친 그의 최종 정체성은 '광대'였다. 장관직을 마치고 다시 배우로 돌아가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열연했다. 현장에 돌아간 그는 여전히 ‘불후의 명작’을 꿈꾼다. 그의 말이다.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아직 내게 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이것저것 편력했던 것 같다. 내가 출연한 〈서편제〉와 내가 제작한 〈우루왕〉을 능가하는 작품을 또 만들어보고 싶다. ‘사수자리’가 내 별자리인데 계속 ‘꿈을 쏘는 사수’로 살고 싶다. 아직 내 가슴엔 화살이 있다.”


“일국의 대통령을 하시겠다는 분의 문화·예술에 대한 식견이 이토록 천박하다니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2002년, 국립극장장이던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내뱉은 쓴소리다. 대통령이 된 후 노 전 대통령은 김 극장장을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했다.


정치적 동지도 아니고 개인적 친분도 없었던 자신을 장관에 임명해준 대통령을 위해 김 전 장관은 그가 서거했을 때 노제를 주관했다. 노제는 쉽지 않았다. 진혼무를 맡았던 국립무용단, 혼맞이 소리를 맡은 국립창극단, 추모 연주를 맡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출연에 제동이 걸렸다. 이명박 정부가 훼방을 놓은 것이다. 불같이 화를 내고 백방으로 수소문해 기어이 이들의 출연을 관철했다.


노제 사회는 방송인 김제동씨에게 맡겼다. 그런데 반발이 거셌다. 양쪽 모두에서 공격받았다. 지지자들이 "왜 딴따라가 노무현 대통령 노제 사회를 보느냐"라며 등에 칼을 꽂았다. 가슴에 큰 상처가 되었지만 김제동씨는 개의치 않고 사회를 보았고 그의 감동적인 사회 뒤에는 이런 말이 쑥 들어갔다. 1년 뒤 추모제 사회도 김제동씨가 보았다. 


그런데 노제와 추모제 사회를 본 것 때문에 미운털이 박혔다. 김제동씨가 진행하던 방송 프로그램에서 퇴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분한 마음에 김 전 장관은 〈시사IN〉 특별 기고를 했다. 부패한 권력에는 웃음을 팔지 않았던 조선시대 광대 이야기였다. <꿈꾸는 광대>라는 자전에세이를 쓸 정도로 '광대론'의 권위자인 그는 김제동씨를 우리 시대의 진정한 광대로 꼽았다. 




광대 김제동은 ‘왕의 남자’의 공길이다(김명곤)


1년 전,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노제 총감독을 맡았을 때 김제동은 사회자로 참여했다. 그는 유서의 내용을 나름으로 재해석한 ‘아름다운’ 말들로 사회 멘트를 장식해서 ‘김제동 어록’을 유행시켰다. 1년이 지난 뒤, 그는 1주기 추모식의 사회자로 다시 참여했고 그 여파로 엠넷(Mnet)의 쇼 MC에서 사퇴하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에 ‘아름다운’ 말로 애도를 표한 개그맨이 정치적 문제로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김제동이라는 연예인이 이 시대의 정치권력과 겪는 갈등을 보면서, 그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옛 시대 광대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연산군 때 ‘공길’이라는 광대가 있었다. 그는 연산군의 황음무도함을 풍자하는 놀이를 자주 벌이다가 발각돼 체포되었다. 그런데 그는 옥에 갇힌 뒤부터 단식을 했다. 그 이유를 묻는 연산군에게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다. “논어에 이르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어버이는 어버이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했는데,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비록 창고에 곡식이 가득한들 내 어찌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말에 분노한 연산군에 의해 공길은 처참하게 매를 맞고 유배를 당했다. 그의 이 짤막한 에피소드는 재능 있는 작가와 감독에 의해 연극 〈이〉와 영화 〈왕의 남자〉로 재탄생되어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러시아에 ‘블라디미르 레이니도비치 두로프’라는 광대가 있었다. 그 또한 공길처럼 러시아를 지배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풍자하는 놀이를 벌인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도 감옥에 가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다. “우리는 어릿광대의 왕이다. 하지만 결코 왕의 어릿광대는 아니다. 우리는 지고한 대중의 어릿광대다.”


구한말에 활약했던 몇몇 기생·광대의 다음과 같은 일화도 무척 시사적이다. 먼저 일제 침략에 항거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 유학자 황현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이야기. 진주 기생 ‘산홍’이 검무를 잘 춘다는 소문을 듣고, 내무대신 이시홍이 천금을 주고 산홍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산홍은 그 제안을 일거에 거절하며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했다. “내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이지만, 일본에 나라를 판 오적의 두목에게 몸을 팔지 않겠다.” 이 말에 크게 노한 이시홍은 그녀를 잡아다 무자비하게 때렸다고 한다.


판소리 ‘서편제’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소리 광대 박유전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무과 벼슬까지 하고 그의 사랑채에 수시로 출입했다. 그러다가 명성황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대원군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명성황후파의 보복을 피해 전라도에 숨어 살았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자 한양으로 올라갔다. 얼마 뒤, 대원군이 죽고 한·일병합이 되자 그는 나라 잃은 가객이 노래를 부를 수 없다며 전라도 어느 땅에 칩거하다가 한겨울에 굶어 죽었다.


같은 시절에 ‘정가소’라는 ‘재담 광대’(요즘으로 치면 개그맨)가 있었다. 그는 북촌의 양반집 사랑방을 돌아다니며 정치나 시사 문제를 풍자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장기는 ‘흥인군 곳간 점고’였다. 흥인군은 대원군의 형으로 동생의 권력을 빙자하여 뇌물 받기를 좋아해서 엄청나게 치부한 사람이었다. 흥인군은 집안에 곳간을 아홉 개 지어놓고 공물을 가득 쌓아놓았는데, 정가소는 이른 아침마다 곳간 문을 열고 공물을 헤아리는 흥인군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또 같은 시기에 ‘정동’이라는 재담 광대가 있었다. 그는 당시 모든 권력과 금력을 장악한 안동 김씨의 비리와 부정부패와 권력남용을 풍자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김씨 일파가 보낸 하수인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맞아 죽었다. 



그토록 권위적이며 봉건적인 시대에, 사회적 약자였던 기생·광대, 즉 오늘날의 문화예술인들이 그토록 저항적이며 진취적인 소신을 가지고 활동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문화예술인들과 정치권력의 갈등은 동학혁명의 실패와 한·일병합,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그 과정에서 ‘저항적’이며 ‘진취적’인 문화예술인들은 철저히 제거되었다. 또한 광복 이후 좌·우익의 이념 대립은 그들에게 분명한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기 때문에 문화예술인들은 어쩔 수 없이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북한의 문화예술인들은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정치권력을 따르게 되었고, 남한의 문화예술인들은 자유민주주의로 무장한 정치권력을 따르게 되었다. 남한의 역대 정치권력은 문화부를 통하여 그들을 ‘관리’하고 ‘통제’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일부’ ‘불온한’ 문화예술인은 군사정부의 독재적이고 폭압적인 권력에 거세게 저항했다. 그들은 민주와 통일과 인권과 평등의 기치를 드높이 내걸고 저항적이고 진보적인 문화예술 운동을 펼쳤다. 1990년대 말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탄생하자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문화부의 관리와 통제 정책은 지원과 육성 정책으로 변했다. 검열 제도가 사라지고, 표현의 자유와 자율성이 신장되었다. 문화예술가들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표현하고, 소신껏 발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0년 현재, 그 결과는 다시 참담해졌다. 문화예술계의 좌파·우파 편 가르기는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기관장 인사 파동, 방송 장악 시도, 표현의 자유 위축 등도 급속도로 심화되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비판적 문화예술인들의 ‘목줄 조이기’라는 구시대적 작태까지 등장한 것이다. 이제 연예인을 포함한 문화예술인들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에게 적당히 이용당하며 살아온 옛 시절로 돌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예술인들에게 다시 한번 정치적 각성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 ‘지고한 대중’의 삶 속에 뛰어들어 저항적이고 진취적으로 살다 간 옛 시대 광대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문화예술인들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김제동은 어느새 이 시대 문화예술인의 길을 묻는 ‘화두’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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