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감성을 일깨우고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줄 ‘감성 멘토’들을 만나왔다. 이외수(소설가) 도종환(시인) 윤도현(가수) 이철수(판화가) 김중만(사진작가) 손혜원(브랜드 디자이너) 김C(가수) 심실(유엔 WTO 홍보대사)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마음의 눈이 먼 현대인, ‘심(心) 봉사’들에게 감성 회복 ‘필살기’를 전수해왔다. 이들에게 인터뷰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을 던졌다. ‘아름다운 시선’이 무엇이고, 현대인이 왜 감수성을 잃었다고 생각하는지,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다음은 이외수 선생의 답이다
왜 감성에 천착하는가?
지금까지는 이성이 지배하는 형이하학 시대였다. 느껴야 하는 시간보다 외워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예체능보다 국·영·수가 중요했다. 이제 감성을 중시하는 형이상학 시대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겨냥해야 한다. 두뇌 중심 교육이 아니라 감성 중심 교육을 해야 한다.
감성을 어떻게 발달시킬 수 있나?
알려고 애쓰지 말고 느끼려고 애써야 한다. 알 수 있는 것보다 느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느끼는 것이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감성을 회복하기 위해 아름다운 시선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상과 합일되어야 한다. 자연과 인간이 잘 조화된 상태가 가장 아름답다. 지금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혹은 물질과 정신의 균형이 깨져버린 상태다.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웰빙운동’도 온통 먹는 타령뿐이다.
대상과 합일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기둥이 되어서, 벽이 되어서, 혹은 지붕이 되어서 세상을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 예전에 산골 아이들이 개구리를 잡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이 돌을 들추면 반드시 개구리가 나왔고 개구리가 튈 방향에 매미채를 대고 있으면 반드시 개구리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백발백중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맞히느냐 했더니, 딱 보면 느낌이 온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느꼈던 것은 개구리와 일체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물과 일체감을 느끼면 진리가 보이나?
문학반 연수생에게 소금과 설탕이 되어서 논쟁해보라고 했다.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소금팀이 설탕팀을 맹공했다. 설탕의 폐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런데 설탕팀이 일거에 제압했다. ‘너희들 개미 모아본 적 있어?’라고 반격하자 소금팀이 허를 찔린 듯 침묵했다.
이곳으로 와서 감성을 회복했나?
물과 공기가 너무 좋다. 숨을 쉬면 뼛속까지 청량해지고 모든 세포가 투명해진다. 주민이 하는 말이 ‘여기는 일급수는 없고 특급수만 있다’는 것이다. 간섭받지 않아서 좋다. 나무가 돈 달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일의 능률도 높아졌다. 여기 와서 2년여 동안 재출간한 것까지 치면 책을 여덟 권 썼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도 작업실에 앉아서 인터넷만 하지 않나(이외수씨는 디시인사이드의 이외수 갤러리를 통해 네티즌과 만난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시대를 읽지 못하면 의식이 진부해지고 작품의 신선도도 떨어진다. 진짜 위대한 것은 쓰레기통 속에 있다. 그런 곳에서 ‘막장’ ‘찌질이’라며 밑바닥 인생을 자처하는 이들과 만날 수 있다. ‘부채질닷컴’이니 ‘개소문닷컴’이니 하는 온갖 저급한 곳을 돌아다니며 엿보고 다닌다. 삼일 밤낮을 잠도 자지 않고 서핑하고 채팅한 적도 있다.
네티즌과 세대 차이는 안 느끼나?
소통의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저 끼워주면 고마울 뿐이다. 육십이 넘은 영감이 직접 댓글놀이를 한다는 것을 안 믿어서 ‘명품은 아니어도 진품이다’ ‘알바 아니고 직타다’라고 하는데도 여전하다. ‘민증 까라’는 놈에게는 바로 확인 전화를 해주기도 한다. 책을 좀 읽은 놈은 글을 보면 대충 난 줄 아는데…. 하여튼 책을 안 읽으면 뭘 해도 문제다.
신조어도 많이 만들어낸 것으로 아는데.
‘졸라 무식하고 용감한 삽질’이라는 의미의 ‘졸무용삽’이나 ‘떡밥은 실리적이고 신선한 것으로’라는 의미의 ‘떡실신’이라는 표현을 만들어줬는데, 네티즌이 잘 응용해서 쓰는 것 같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비결이 있다면?
내 중심은 문학이다. ‘이것은 문학을 위한 것이다’라고 하면 무엇을 해도 부끄럽지 않다.
네티즌의 비난으로 상처를 입기도 하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가끔 있기도 하다. 그러나 봉이 개천에 내려와 놀 때는 새우의 조롱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지 않겠나.
가장 기억에 남는 비판은?
극렬 이명박 추종자들이 비열한 인신 공격성 발언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이 인터뷰를 빌려 그들의 근성과 지구력에 찬사를 보낸다. 남의 글을 비판할 때는 글의 요지라도 파악하는 것이 예의인데, 이 시대가 지독한 난독증에 빠진 것 같다. 나는 단순히 이명박 후보가 맞춤법을 틀렸다고 지적한 것이 아니라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가르치겠다는 것을 비판했다.
이명박 당선자는 ‘국민 성공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어떠한 성공도 그 성공에 의해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진정한 성공이 아니다. 한쪽은 행복해지고 한쪽은 불행해지는 성공이라면 오히려 피해야 한다. 당선자가 ‘내가 있으니 걱정 마시오’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믿어준다면 그것이 바로 그의 성공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성공은 무엇일까?
낭만을 되찾는 것이다. 낭만은 멋이다. 멋은 다양한 아름다움의 요소를 내포한다. 이 시대는 의식이 척박해져 멋을 잃었다. 나는 ‘낭만 관리사’를 자처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멋을 되찾기 위해 나를 찾아오는데, 그것을 나누는 데 한 번도 인색했던 적이 없다.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가서, 아름다운 시선을 갖는 것이 왜 필요하다고 보는가?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아름답지 않은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해서 아름다움을 느껴야 사랑하게 된다. 아름다움 잃는 것은 사랑을 잃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일 수 있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잃고 사랑을 잃는 것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위치와 체면을 잃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능력을 지키는 것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의 위치와 체면을 지키는 일이다.
# 2011년 트위터를 계기로 만났을 때는 이야기의 주제가 '소통'이었다.
트위터계의 간달프’ 이외수씨(소설가)는 트위터러 100여만 명과 소통한다. 어떻게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꼰대’가 아닌 ‘트윗돌’이 되었을까. 그만의 소통법과 생존법, 그리고 즐거움을 소개한다. 모두가 소통을 말할 때‘소통 원정대’가 ‘소통 종결자’를 찾아 나섰다. ‘절대 감성’을 무기로 트위터러와 소통하는 ‘트위터계의 간달프’ 소설가 이외수씨(@oisoo)가 그 주인공이다.
물론 소통을 단순히 숫자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럼에도 소통의 양과 질에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팔로어 수는 최고 인기 아이돌 스타의 팔로어보다 곱절 많다. 트위터 리트윗(전달 글)과 리플라이(답글) 숫자 등 리액션(반응)을 통해 순위를 매기는 ‘twitoaster.com’에서 그는 전 세계 5위권이다. 주당 1만5000~2만 건으로 CNN 〈브레이크 뉴스〉와 〈뉴욕 타임스〉를 능가했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이외수 선생의 삶은 자신을 세상과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주류 사회로부터, 주류 문단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았다. 글을 쓸 때는 교도소 철문을 잠그듯 스스로를 유배시키고 썼다. 급기야 춘천에서 화천의 두메산골(감성마을)로 이주했는데도 사람들은 그를 찾아 산길을 달려온다. 어떻게 그는 예순이 넘는 나이에 ‘꼰대’가 아닌 ‘트윗돌(트위터+아이돌)’이 되었을까? 사람들은 그에게서 무엇을 얻으려고 감성마을로 달려가는 것일까?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신년 벽두에 감성마을로 찾아갔다.
▶사람들이 감성마을에 몰리는 까닭
고재열:2년 전 인터뷰할 때 이곳 감성마을은 1급수가 아니라 특급수가 흐른다고 했다. 그런데 감자공장이 들어서고 구제역이 옥죄어오고 있다. 여기까지 개발 여파가 들이닥친 것 같다.
이외수:위기감이 있다. 당장 산천어축제가 취소되었다. 화천이 가졌던 지금까지의 평화가 깨졌다. 전국에서 100만 명 이상이 오는 최고 축제인데 아쉽다. 이곳은 가장 청정한 지역이고, 그걸 자랑으로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전염병이 돈다는 것은 화천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위기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재열:2년 전과 달라진 부분이 또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위로받으러 감성마을을 꾸준히 찾아온다는 점이다. 남쪽에 ‘봉하마을’이 있다면 북쪽에는 ‘감성마을’이 있다. 엊그제 김제동과 만화가 강풀이 왔다 갔고, 그전에 역도선수 장미란과 우주인 이소연도 왔다 갔다. 그들은 무엇을 얻으려고 여기 왔는가?
이외수:일단 자유가 있다. 속세를 떠나서 구가할 수 있는 자유인데, 최소한의 질서와 도덕성은 가진 자유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누리는 무한한 의식의 자유다. 세속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다. 밖에서 생활하다가 노폐물이 잔뜩 쌓였다고 생각하면 훌쩍 와서 정화하고 간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거침없는 대화가 가능하다. 어떤 분야든지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다.
고재열:장미란 선수와 우주인 이소연씨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갔는지 궁금하다. 일전에 이 선생께서 우주인과 접선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소연씨가 왔다 가면서 그 부분은 증명된 것 같다(웃음).
이외수:두 사람 다 공통적인 고민이 있었다. 성격은 다들 화통한데, 부담스러운 일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한 명은 운동만 열심히 하고 한 명은 연구만 열심히 하고 싶은데, 여느 일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다. 소속한 기관의 발전을 위해서 개인이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의 고민에 맞장구를 잘 치니까 좋아하는 것 같다.
고재열:인맥을 연결해주거나 용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희한하다. 나쁜 것을 털어놓고 좋은 것만 챙겨가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방문이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나?
이외수:대화하는 게 즐겁다. 다른 분들이 내가 못 가진 즐거움을 주니까, 그걸 얻는다. 여기 다녀가는 이들은 대개 잘된다. 묘한 징크스가 있다. 구혜선·소지섭·박진희·바닐라 루시·엠블랙·갤럭시 익스프레스…. 원래 잘 나가던 사람도 여기 다녀가면 더 잘 나간다.
고재열:우리도 그래서 왔다(웃음). 2년 전에 한 번 다녀갔는데 약발이 다 떨어진 것 같아서….
▶왜 ‘자뻑’이 필요한가?
이외수:이건 ‘자뻑(자기 자신에게 도취된 것)’으로 하는 소리가 맞다. 하지만 자뻑이 비타민제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은 자뻑을 많이 해야 한다. 자기 비하를 많이 했던 민족인데, 이제 좀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자만심까지도 용납할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했던 건 아닐까.
고재열:자뻑의 노하우는 무엇인가? 좋은 자뻑과 나쁜 자뻑이 있을 텐데, 밉지 않게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을 유지하는 비법이 궁금하다.
이외수:자뻑은 착각보다 믿음에 근거해야 한다. ‘나는 언젠가 잘될 것이다, 지금은 때가 아닐 뿐이고 언젠가는 잘될 것’이라는 걸 스스로 되뇌면서 신념을 갖는 게 중요하다. 믿음은 신을 만든다. 아침마다 세수할 때 거울 보면서 스스로를 격려하는 일도 중요하다. 실제 이 방법을 써서 성공한 사람이 많다. 나도 그랬고.
고재열:젊은 시절 자괴감과 모멸감의 덩어리로 살다가 자뻑과 자부심으로 꽉 찬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변화의 계기는 무엇이었나?
이외수:노력이 중요하다. 날로 먹겠다는 거 말고. 항상 노력을 밑바탕으로 자뻑해야 한다. 그리고 만물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 나 혼자 힘으로 이루려 하지 말고,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의 ‘빽’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마음으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천지신명이시여,라며 하늘에 있는 모든 신을 모두 다 내 편으로 삼아서 도움을 간청한 것처럼….
고재열:사람들은 선생님이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부분을 부러워하는 것 같다.
이외수:나는 생각과 마음의 차이를 잘 안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도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생각과 마음의 차이를 알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감정은 생각이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흥부가 다리 부러진 제비를 보고 불쌍해 못 견디는 건 마음이다. 그것을 보고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한몫 잡아야겠다는 게 생각이다. 대상과 내가 합일이 되면 마음이 작용한다.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감정은 몸을 다치게 하는데, 지나치게 슬프면 폐가 다치고, 지나치게 분노하면 간을 다치고, 지나치게 근심하면 위를 다친다. 또 지나치게 겁을 많이 내거나 두려워하면 심장이 다친다. 감정과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다. 감정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려면 모든 대상을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고재열:요즘 잘 놀고 잘 쉬는 ‘놀쉬돌’ 연구를 하고 있다. 선생님은 뛰어난 ‘놀쉬돌’처럼 보인다.
이외수:난 진짜 잘 논다. 끝내주게 노는데….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덕이다. 놀 때는 미친 듯이 놀고, 일할 때는 미친 듯이 일한다. 탈진할 때까지.
▶소통 일인자가 되기까지
고재열:상당히 아이러니한 것은 가장 소외되었던 인물이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단절된 공간에 떨어져 있었던 사람이, 그리고 늘 어떻게 사람들로부터 나를 떨어뜨려놓을까를 고민한 사람이 소통 일인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외수:사람들이 뼈저린 슬픔 혹은 아픔이라는 말을 쓰는데, 나는 정말 뼈가 저리는 체험을 하며 살았다. 40대 초반까지. 그래서 차라리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웃음). 땅을 긴 놈들이 하늘을 제일 잘 난다. 애벌레 때 가장 땅을 박박 긴 놈들이 하늘을 제일 잘 보는 거다.
고재열:선생님 연배가 된 분 중에는 자기를 대접해달라며 아래 세대에게 압력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권위 의식이 안 보인다.
이외수:나이가 곧 면류관은 아니다.
고재열:그래도 대접을 못 받을까 봐 불안감이 있지 않나?
이외수:대접받을 여지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나이만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다. 예전에는 나이 든 것만으로도 높은 도덕성을 인정받고 존경받았지만, 지금은 그런 가치관이 붕괴되었다.
고재열:기성세대는 계급장 떼는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것 같다.
이외수:나는 계급장 떼고 ‘맞짱’도 떠봤다. 몸을 사리는 체질이 아니다. 하도 장대 끝에서 많이 떨어져 봐서 익숙하다. 지금은 어쨌든 그 덕을 많이 본다.
고재열:그때 겨루었던 승부들 중에 기억나는 게 있는가?
이외수:사실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하고 글로 맞상대를 하는 것만큼 무모한 것이 없다. 싸우려면 수준을 맞춰야 한다. 글로 하려면 상대랑 똑같은 수준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찌질이’라고 얘기하거나 막장 혹은 잉여라고 자칭하는 무리들하고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단지 그들은 존재감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는 존재감을 거기서 찾을 이유는 없었지만 달려봤다. 웃대(웃긴대학), 코갤(코미디 갤러리), 정사갤(정치사회 갤러리), 식물갤(식물 갤러리)까지…. 두루 돌아다녔으니까 더 갈 곳이 없다. 이제는 트위터로도 만족한다.
▶팔로어 100만의 비결
고재열:선생님은 가장 잘 나가는 아이돌보다 팔로어 수가 더 많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이외수:전에도 얘기했지만, 꼭 달거나 고소한 것만 음식 재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맵고, 쓰고, 시고, 떫은 것이 섞여 있어야 풍성한 밥상이 된다. 내가 올린 글에는 먹을 것이 고루 섞여 있다. 그리고 거기에 내 정성을 쏟아붓는다. 무성의하게 올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다못해 리트윗(전달)을 하는 경우에도 아주 짤막하게나마 언급한다. 독려를 하는 의미에서 올리는 것인데 나름 고심해서 올린다. 한 명이라도 더 공감하고 그것을 같이 리트윗 할 수 있도록 하는데, 그 진심이 전달되는 것 같다. 트위터에서는 가급적 생각보다 마음을 담으려 애쓴다.
고재열:인터넷 글쓰기에 대해 고민할수록 인터넷은 이해와 설득의 공간이 아니라, 공감과 교감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느낌에 솔직해지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선생님의 100만 팔로어를 만든 비결인 것 같다. 설득하지 않고 공감하게 만드는 것.
이외수:팔로어 수 5위권 안에 있는 사람들 글이 대개 그렇다. 느끼게 하는 글이 중심이다. 그것이 감성 아니겠나. 설명하면 이성이 되는 거고, 느끼게 하면 감성이 되는 것이다. 20세기까지는 이성이 주가 되었지만, 21세기에는 감성이 시대를 주도한다.
고재열:인기 드라마 〈시크릿 가든〉 식으로 표현하면, 화천에 계시는 감성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쓴 글이라고 보면 되는 건가?(웃음) 중요한 이야기를 하셨다. 생각보다 마음을 담으려고 했다는 것이 핵심인 것 같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이성과 설득의 공간이 아니라, 공감과 교감의 공간인 것 같다.
이외수:일종의 시제를 제시하는 식으로 트위터에 ‘일문천답’을 던지는데, 끔찍하게도 천편일률적인 답이 나온다. 팔로어들이 그걸 통해서 더 감성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순발력 있게 상황에 대처하는 경험을 해보라는 것인데, 중복이 많다. 사람들이 남의 것을 안 읽는다. 다들 자기 발밑밖에 보지 않는다. 이것이 성공을 저해하는 또 하나의 요소다.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고재열:일문천답에서 장원으로 뽑는 글은 어떤 내용인가?
이외수: 오늘은 “깊은 산속 옹달샘에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왜 물만 먹고 갔을까”라는 질문을 올렸다. 그랬더니 누가 “내가 세수한 물을 다른 토끼가 먹을까봐”라는 답을 주더라.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 예전에 “춘향이를 대령하라고 했더니 졸개들이 착오로 심청이를 대령했다. 수청을 들라고 했을 때 심청이가 뭐라고 했을까?”라고 올렸더니 “그래 좋다. 단둘이 방에 들어가자. 그리고 불 끄고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라는 답이 왔다. 이렇게 남들 안 가는 길을 끝까지 가보는 것이 필요하다.
▶소통 방정식
고재열:선생님의 트위터를 미디어로 이용할 경우 사실상 5대 언론에 들 정도로 팔로어가 많은 셈인데, 앞으로 이 잠재력을 활용할 계획이 있는가?
이외수:트위터에는 바쁘게 사는 사람이 많다. 즐길 기회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좀 고급한 문화를 접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공연도 좀 색다르게 기획해서 보여주고 싶고, 예술작품도 정말 접하기 쉽지 않은 것을 기획해서 보여주고 싶다. 직접 오프라인에서 함께 어울릴 기회도 많이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강연도 들어보고 싶다.
고재열:트위터에 역사 인물 계정이 있다.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정조 등이 있는데 감성마을의 멧돼지나 소나무를 위한 계정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이외수:맞다. 광의의 소통이 필요하다. 사실은 제일 말이 안 통하는 것이 사람이다. 소통의 방식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이 소통에 불편한 요소들을 더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고재열:만물과 소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외수:사랑이다. 대상에 대해 애정이 없으면 소통은 불가능하다.
고재열:트위터를 하면 좋은 점이 무엇인가?
이외수:문장력이 굉장히 좋아졌다. 특히 군더더기를 발라내는 데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농축된 진액만 전달하는 훈련이 된다. 글 쓰는 사람에게 습작 공간으로 참 유용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다른 표현은 없을까, 고민하고 쓰면 효과가 클 것이다. 음식에 대해 쓰더라도 특별한 글맛이 나도록….
고재열:트위터를 하면서 잃은 게 있다면?
이외수:신비감(웃음)? 그렇지만 아직 다 노출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미처 모르는 부분이 무궁무진하다. 기회가 되면 나무젓가락으로 함석 뚫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동영상으로.
고재열:우주인과 교신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이외수:허경영이 이미지를 다 버려놓았다. 나는 다른 버전인데 사람들이 같은 급으로 오해한다. 속상하다(웃음).
▶몰입의 즐거움에 대해
고재열:선생님도 20대에는 볼품없지 않았나? 원조 ‘잉여’ 아니었나? 요즘 화법으로 얘기하자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식의 이야기를 요즘 젊은이들에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외수:처참했다. 그래도 인기는 없는 편이 아니었다. 교수들이 여학생들에게 이외수랑 다니지 말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지금처럼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고 반항을 잘해서 인기가 있었다. 능력과 관련해서는 20대부터 40대까지 거의 소외로 일관했다(웃음).
고재열:요즘 사람들은 무언가에 몰입하는 일을 겁낸다. 혹시 ‘중독’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트위터에 빠져 다른 것 못하면 어쩌나, 이렇게 겁을 내는 사람에게 선생님께서 했던 충고가 인상적이었다. “재밌을 때는 재밌는 걸 하면 된다”라는 말씀.
몰두해야 높은 경지에 올라
이외수:몰입하는 경험은 쓸데없는 게 하나도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른들은 애들이 공상을 하면 쓸데없는 생각 말라고 한다. 공상이나 망상이나 쓸데없는 건 없다. 이 우주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고재열:선생님은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하는 듯 보인다. 디시인사이드 게시판에서 폐인처럼 지내기도 한다.
이외수:내가 나무젓가락으로 땅바닥에 끼적끼적하고 있으면 옆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 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거의 낙서 같기도 하고 그랬는데, 결국 거기서 글자 폰트가 나오기도 한다. 그 덕에 산천어축제 때 그 글씨로 모든 상호를 다 도배하다시피 했다. 어떤 것에 몰두하면 높은 경지에 이른다. 건성으로 하면 어떤 걸 해도 쓸 데가 없다. 제일 좋기는 ‘이거 하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고재열:배수진 치고 하라는 말로 알아듣겠다. ‘무대책의 대책’ 혹은 ‘무계획의 계획’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선생님이 살아오신 인생이 그랬다. 그런데 요새 사람들은 대책도 많고 계획도 많다.
이외수:‘안 되면 어떡하지?’라면서, 해보지도 않고 결론을 산출한다. 되는 경우도 좀 생각해야 하는데 부정적인 쪽으로 치우쳐 있다. 100% 잘 되는 경우만 선택하려고 하는데, 그건 날로 먹으려는 강도짓이다. 아니 강도보다 더 나쁘다. ‘떨어지면 무르팍이 깨질 텐데’ ‘팔이 부러질지도 몰라’라고 생각하기 전에 한번 떨어져 보는 게 필요하다.
▶트위터 궁금증 클리닉
고재열: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고 들었다. 다이어트 비법을 묻는 트위터 이용자도 많다.
이외수:굶어 버릇하면 배도 안 고프다. 배고픈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몸이 잊는다. 한 번 굶으면 15일씩 가기도 하는데 굶으면 의식이 어마어마하게 청명해진다. 감각도 극도로 예민해진다. 요즘도 문하생들에게 “나 밥 먹었냐?” 하고 묻고 안 먹었다고 하면 먹고, 그냥 지나가는 날도 있고…. 몸한테 미안해서 먹기도 한다.
고재열:잘 안 씻는다는데 머릿결이 좋다.
이외수:집사람이 늘 빗겨준다. 매일. 머리도 직접 감겨준다. 머리 감을 때 쓰는 의자가 있다. 여러 사람 앞에 나갈 때는 깨끗하게 나가는 게 예의니까. 내 성격이 트리플 A형이다. 그것도 소문자 a형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는 것 정말 싫다. 그래서 그냥 씻는 척할 뿐이다.
고재열: 별명이 많다. 감성 괴물, 낭만 관리사, 영혼의 연금술사…. 그 밖에 어떤 것들이 있나?
이외수:‘트위터계의 간달프’라고 고 기자가 붙여주지 않았나. 예전에는 부정적 의미를 가진 별명이 많았는데 지금은 긍정적인 게 많다.
고재열:사람들이 선생님의 센스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기를 수 있나?
센스 있는 감각, 훈련해야 생겨
이외수:센스는 감각이다. 눈치랑은 다르고. 눈치를 챘더라도 표현하는 것이 감각이다. 감각은 좀 훈련을 해야 한다. 가급적이면 젊은 세대들하고 자주 시간을 가져야 한다.
고재열:이전에 트위터에서 누가 “자꾸 가위에 눌리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라고 하기에 “주먹 쥐고 주무세요”라고 한 적이 있다(웃음). 또 최근에는 “친하지 않은데 팩스로 청첩장이 왔다”라고 하기에 “1만 원짜리 다섯 장 복사해서 팩스로 보내라” 하고 말해주었다(웃음).
이외수:나도 작년에 “라면 끓일 때 수프를 먼저 넣나, 라면을 먼저 넣나?” 하고 묻기에 “물부터 넣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웃음).
고재열:정치나 시사 쪽도 콕콕 찍어 따끔하게 이야기를 해줬으면 하는 요구가 많다.
이외수:얘기해도 전혀 안 변한다. 그분들이.
고재열:전에 이명박 대통령에게 맞춤법에 맞게 쓰라고 충고한 적이 있는데, 새해를 맞아 다시 한다면 어떤 충고를 하고 싶은가?
이외수:지금까지 우리 국민은 사실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한다. 경제가 좋아진 것도 정치인이 정책을 잘해서가 아니라 국민 덕분이다. 그런데 연초부터 부정부패 비리가 드러나서 일하고 싶은 의욕을 떨어트리고 있다. 국민 힘 빠지지 않게 엄중 처벌해주기를 부탁한다.
이외수:이건 좀 이야기가 길어야 할 듯싶다. “예수가 정의로우냐?”라고 물으면, 기독교인들은 다 정의롭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나간 자리 치고 전쟁이 없었던 자리가 없다. 가장 쉬운 예로 예수 한 명 때문에 그때 나이가 비슷했던 두세 살 짜리 아이들이 다 죽임을 당했다. 그 엄마들에게도 예수는 정의로운 존재일까? 진정한 정의는 우리 편만 좋은 게 아니다. 양쪽 편 다 행복하고 평화로워야만 정의다. 공히 양쪽 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회다. 한국 사람들은 딱 두 가지 부류의 인간밖에 없는 듯 살아간다. 자기와 같은 인간과, 자기와 다른 인간. 다르면 다 적이 되고 같으면 다 같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다양성이 곧 정당성은 아니고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모든 잘못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의는 네 편 내 편 공히 평화로운 것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