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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Sep 13. 2021

코카서스의 숨은 보석 아르메니아


'조지아 와인 랜선 투어'를 진행하다 자연스럽게 아르메이나 이야기가 나왔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코카서스 3국은 여러모로 비교된다. 유럽인들이 보기에 한중일이 비슷해 보이지만 한중일이 완전히 다르듯 이 코카서스 3국도 다르다. 인종적으로도 조지아는 코카시안, 아르메니아는 아리안, 아제르바이잔은 투르크계로 다르다. 이중 우리와 가장 비슷한 느낌의 나라는 바로 아르메니아다. 


순정만화의 배경 나라 이름일 것 같은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 3국 중 유일하게 대국을 이룬 경험이 있는 나라다. 제국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고구려나 발해 정도의 대국을 경험했기에 인접 국가들의 견제를 받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다. 교회가 핍박 받아 산골이나 동굴로 들어간 양상은 우리 사찰의 입지와 비슷하다. 아무튼 한국인에게는 여러모로 정이 가는 나라다. 



“조지아(그루지야)가 보름달이라면 아르메니아는 초승달이다.” 코카서스 (현지명 캅카스) 3국(조지아·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여행한 사람들의 대체적인 평이다. 코카서스 지역은 요즘 가장 핫한 여행지다. 여행 프로그램은 물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집중 조명되었다. 코카서스에 가기 전에는 보통 조지아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막상 다녀오면 아르메니아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한다. 조지아처럼 압도적인 설산 풍경은 없지만 음식이나 문화가 우리와 더 맞기 때문이다.


코카서스 전문 여행 가이드인 블라디미르 박(한국명 박종원) 씨는 코카서스 여행 코스를 설계할 때 아제르바이잔-조지아-아르메니아 순서로 스케줄을 잡는다. 그래야 여행하면서 점점 더 좋은 것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적성 국가라 바로 못 가고 꼭 조지아를 거쳐야 한다). 패키지여행의 경우 보통 아제르바이잔에서 1~2박을 하고 아르메니아에서 3~4박을 하는 식으로 구성한다.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에 비해 국민소득이 두 배 이상인데 왜 이런 차이가 날까? 바로 문화의 힘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는 새로 지어진 유럽풍 건물이 즐비하다. 그런데 여행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테마파크 같다’고 말한다. 반면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는 문화를 느낀다. 두 도시의 극명한 차이를 “한쪽은 1억원을 들여 1000만원 효과를 내지만 한쪽은 1000만원을 들여 1억원 효과를 낸다”라고 비교하기도 한다. 



2018년 9박11일 일정으로 진행한 〈시사IN〉 트래블 ‘코카서스 대자연 기행’ 참가자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참가자들은 다녀온 후 대부분 아르메니아를 다시 가고 싶은 나라로 꼽았다. 문화 수준도 높고 사람들도 좋고 심지어 수박과 멜론도 아르메니아 것이 더 맛있다고 했다. 특히 수도 예레반을 오래 머물고 싶은 매력적인 도시로 꼽았다.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의 숨은 보석인 셈이다.


세 나라 모두 인구 1000만명이 안 되는 작은 나라지만 코카서스 3국은 인종·문화·종교적으로 차이가 크다. 한·중·일의 차이만큼이나 선명하다. 인종적으로 조지아는 코카시안 계통, 아제르바이잔은 투르크 계통, 아르메니아는 아리안 계통이다. 조지아는 조지아정교를,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교를,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주로 믿는다. 이런 인종과 문화 차이가 코카서스 여행을 즐겁게 한다.


지금은 인구도 가장 적고 국토도 제일 좁지만 코카서스 3국 중 아르메니아가 가장 ‘잘나갔던’ 나라다. 조지아(고대 이베리아 왕국)와 아제르바이잔이 소국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아르메니아는 왼쪽으로는 로마와 오른쪽으로는 페르시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대국이었다. 세력 싸움에서 밀리며 강대국의 견제를 많이 받았다. 조선 시대 ‘삼전도의 굴욕’처럼 아르메니아 왕 역시 로마 황제 앞에서 검투사와 싸워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강대국에 시달린 역사뿐만 아니라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촛불집회 같은 민주화 시위로 정권교체를 이룬 점도 닮았다. 올해 초 세르지 사르키샨 총리가 장기 집권을 획책하자 아르메니아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기행팀의 안내를 맡은 아르미네 함바르주미얀 씨는 “대규모 집회가 있던 날 한국 관광객들을 데리고 세반 호수로 가고 있었는데 시위대에 길이 막혔다. 상황을 알아보려 여기저기 전화를 하던 중 총리가 퇴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 관광객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라고 말했다.


아르메니아의 굴곡진 역사는 현대의 아르메니아 문화에 격조를 남겨놓았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낡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낡음이 아니라 전통이고, 그것이 현재에도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펼쳐 보였다. 전통을 현대화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인테리어에 활용했다. 맥락 없이 유럽 문화를 이식한 아제르바이잔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이런 문화적 자존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예레반이다. 



예레반 중심부는 원형으로 되어 있다. 공화국광장을 중심으로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 있다. 공화국광장에서 오페라극장을 지나 캐스케이드 조각공원에 이르는 길이 ‘주작대로’처럼 중심가 구실을 한다. 이 중심가를 따라 걸으면 1인당 국민소득 3500달러 국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문화적 풍요를 접할 수 있다. 도심지의 수준은 유럽 선진국에 육박한다. 공화국광장에서 오후 9시 무렵 시작되는 화려한 분수 쇼를 관람하고 오페라극장 주변의 노천카페에서 차나 커피를 마시며 여행자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예레반은 시내 어떤 곳에서라도 아르메니아인의 성산(聖山)인 아라라트 산(5137m)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아라라트 산은 노아의 방주가 표착한 곳으로 성경에도 나와 있다. 하지만 소비에트연방 시절 스탈린이 이 산을 터키에 넘겨주면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갈 수 없는 산이 되어버렸다. 터키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학살의 가해국이기 때문이다.


터키는 오스만튀르크 왕조 시절이던 1915~1916년 아나톨리아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수십만명(터키 측 주장 20만명, 아르메니아 측 주장 200만명)을 집단 학살했다. 아르메니아 이주자가 많은 프랑스는 ‘아르메니아 학살 부인 금지법’을 제정하기도 했다(2011년 12월 프랑스 의회가 통과시킨 이 법은 공개적으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인하는 행위에 대해 1년의 실형과 4만5000유로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2년 프랑스 헌법재판소가 이 법에 위헌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2016년에는 독일 연방의회가 집단 학살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튀르크의 집중 견제를 당한 것은 과거에 강력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을 피해 해외로 이주하면서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가 이뤄졌다. 현재 국내 거주(약 300만명)보다 해외에 사는(약 700만명, 이 중 400만명이 러시아에 거주) 아르메니아인이 더 많아서 ‘제2의 유대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국내 거주 아르메니아인들도 국토의 대부분을 잃고 산악지역으로 밀려나 아르메니아 국토의 평균 고도는 1800m에 이른다.


왼쪽으로는 로마와 오스만튀르크 (터키), 아래로는 페르시아(이란), 오른쪽으로는 몽골과 티무르제국, 위로는 제정러시아와 옛 소련(공산주의)에 시달리면서도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지켜냈다. 어렵사리 지켜낸 신앙이기에 아르메니아인들의 신앙에는 엄숙함이 있다. 이를 이종원 여행작가협회 회장은 “신앙의 순수함과 절제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이나 로마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라고 평가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301년)로 기독교(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국교로 삼은 나라인데,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선교를 한 다대오와 바돌로매를 중시한다. 


주) 아르메니아 주요 여행지, 술과 음식, 음악과 예술에 대하 이야기는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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