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 동안 그린피스의 고래 탐사선 ‘에스페란자호’에 승선했던 사진기자 후배는 빈손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4일 동안 동해를 샅샅이 살폈지만 결국 고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득 다큐 PD들의 푸념이 생각났다. ‘동물은 섭외가 안 된다’라는 말이. 다큐 PD들은 자연다큐멘터리 제작의 어려움을 ‘감나무에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토로하곤 했었다.
MBC ‘눈물 시리즈(북극-아마존-아프리카-남극의 눈물)’가 히트한 후 대작 다큐멘터리 제작이 이어졌다. 2012년의 경우 방영된 다큐멘터리의 규모도 만만치 않다. MBC <남극의 눈물> 제작비가 25억 원, KBS <슈퍼피쉬>가 19억 원이었다. 다큐 4강으로 꼽히는 BBC NHK 내셔널지오그래픽 디스커버리 채널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갔다는 것이 방송계의 평가다.
이제 방송사들은 창사기념일에 맞춰 대작 다큐를 제작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HDTV가 대중화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MBC가 <남극의 눈물>로 ‘눈물시리즈’를 마무리 짓고 KBS가 <슈퍼피쉬>로 문명 다큐의 계보를 이었다. 한국 대작 다큐가 시즌2로 진입하기 위해서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다큐 제작진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 다큐가 진화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를 여행에 적용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다큐 명가인 EBS, MBC, KBS의 장점을 여행의 영역에서 끌어와서 생각하면 이렇다. EBS에서 주목할 것은 팀워크다. 지금의 시대가 어떻고 여기서 우리가 들여다 봐야할 것이 무엇인지 총의를 형성하고 각론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프로그램에 짜임새가 있을 수밖에 없다. MBC는 '우리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편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라 신파적 다큐 제작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BBC NHK가 읽은 세상을 우리 시선으로 읽는 과정도 필요하다. KBS는 가장 정공법으로 덤빈다. 그러다보니 간혹 어떤 다큐는 인간의 온도에 다다르지 못하게 싱겁게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온도가 맞으면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온다. 여행 기획에서도 충분히 검토할만한 접근법이다.
# EBS, 팀워크를 바탕으로 프리프로덕션 철저히
다큐 제작진 인터뷰를 해보면 빠뜨리지 않고 하는 말이 있었다. ‘맨땅에 헤딩한다는 생각으로 부딪쳤다’라는 말이다. 이제 충분히 헤딩은 하지 않았나 싶다. ‘다큐멘터리 2.0’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시스템 구축이 아닌가 싶다. 적은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EBS가 꾸준히 수작을 낼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 덕분에 EBS는 방송 3사를 제치고 해외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다큐멘터리를 판매하는 방송사가 되었다. EBS가 대작 다큐를 주로 제작하는 곳은 아니지만 이 시스템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EBS PD들에게 팀워크의 비결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2007년 EBS 내부에 다큐를 전담하는 ‘다큐 프라임’ 팀이 꾸려진 뒤, PD 수십 명이 양평에서 한 달 동안 숙식하며 다큐멘터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부터 효과적인 표현 방법까지 고민하고 토론하며 팀워크를 다졌다고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아이의 사생활> <학교란 무엇인가> <인간의 두 얼굴> <한반도의 공룡> 같은 작품이다. EBS 다큐는 감성이 아닌 이성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EBS ‘다큐프라임’ 팀의 제작 과정은 이렇다고 한다. 1년에 2~3회 다큐멘터리 아이템을 공모한다.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제작될 작품을 결정한다. 제작이 결정되면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팀 동료들로부터 조언을 받아 기획을 다진다. EBS 다큐멘터리는 개인기에 의존하기보다 팀워크에 더 많이 기댄다. 공동작업 과정을 통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기 때문에 질이 고르게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속편을 제작할 때도 이런 팀워크 시스템이 위력을 발휘하고, 담당 PD가 바뀌어도 작품의 질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다음은 전문인력과 기술의 문제다. 다큐 관련해서 제작진들이 토로하는 가장 큰 문제는 전문인력 부족 부분이다. 요즘 다큐의 대세가 된 캐논 5D-MARK2나 5D-MARK3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인력도 부족하고 특수 카메라 노하우도 부족하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일종의 R&D 비용이라 할 수 있는 사전 탐사 비용이다. 제작 노하우가 적고 축적이 되지 않아 해외 방송사들이 뚫어놓은 촬영 루트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 경우 비슷한 화면이 나와서 표절시비에 휘둘리곤 한다.
신기술 사용은 다큐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슈퍼피쉬>의 경우 스틸카메라 60여 대를 활용함으로써 타임 슬라이스(Time-Slice:복수의 스틸카메라를 피사체로부터 동일한 간격으로 설치한 다음 동시에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고 이를 연결해 편집하는 기법. 이를 활용하면 입체적인 정지 동작을 화면에 구현할 수 있다)를 구현했다. 시야가 180도인 인간에 비해 90도 이상 시야가 넓은 물고기의 시선으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입체적 촬영이 가능한 케이블 캠(Cable Cam)을 활용하기도 했다.
# MBC, 현지인과의 친교 통해 깊이 있는 촬영
신기술과의 융합과 함께 중요한 요소는 새로운 연구성과의 반영 문제다. 국내 다큐는 학자들의 학문적 성취와 화학적 결합을 이루지 못하는 편이다. 학자들의 연구 역량이 미치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시청자들에게 깊이 있는 깨달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슈퍼피쉬>에서도 다양한 물고기 절임 문화에 대해 보여주었지만 해양 강국들이 저마다 물고기를 절이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이것이 해양문명의 확장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조명해주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연출가들은 저널리스트이면서 환경생태학자이면서 동시에 문화인류학자가 되어야 한다.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비교 요소는 깊이다. <아프리카의 눈물>을 제작했던 MBC 한학수 PD는 “어디를 가나 BBC와 부딪쳤다. 북극에서도, 아마존에서도, 심지어 아프리카에서도. 아마 그들도 이제 우리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고민해보았다. ‘얼마나 더 오래 버티나, 얼마나 더 깊숙이 들여다보나’가 관건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현지인들과 나누는 친교는 해석의 깊이를 더해준다. <북극의 눈물>과 <아마존의 눈물> 제작진이 현지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던 비결도 이런 스킨십에서 나왔다. <아마존의 눈물>을 연출한 김진만 PD는 “현지인 또한 관찰자다. 그들도 우리를 관찰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마음껏 관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몸을 만지고 싶으면 만지게 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쓰다듬게 했다. 그러자 경계를 풀었다”라고 말했다.
친교를 바탕으로 깊이 있는 촬영을 한 다음은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다. 우리 다큐멘터리가 성장한 데는 한국형 다큐멘터리 서사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 주효했다. BBC와 NHK가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면 우리 다큐멘터리는 1인칭 관찰자 시점 혹은 주인공 시점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MBC ‘눈물 시리즈’). 이로써 한국 다큐멘터리는 제작진과 함께 현지로 관광이나 답사를 떠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데, 이것이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제작방식이 정통 다큐 제작 방식은 아니다. ‘눈물 시리즈’ 중에서도 <아프리카의 눈물>은 정통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다. 아프리카의 현실인 총과 피를 피해 가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 것에 대해 장형원 PD는 “성공의 길이 보이는데, 다른 길을 가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고민했다. 하지만 현실을 피하고 판타지를 좇을 수는 없었다. 정공법을 택한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 KBS, 문명 다큐의 정공법 이제 정상 괘도에
한국형 다큐의 전형을 만든 MBC와 달리 KBS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MBC가 자연다큐에 강한 반면 KBS는 문명 다큐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룩했다. 정연주 사장 시절 그 근간이 만들어졌는데, KBS는 대작 다큐멘터리 연속기획을 선보였다. 실크로드나 초원길보다 앞선 문명 교역로 차마고도를 다룬 <차마고도>(2007) 제작에는 당시로는 기록적인 12억 원이 들었다. 방송 다큐멘터리로서는 최초로 <차마고도-마지막 마방 편>이 에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천상의 길 차마고도>라는 이름으로 극장판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제작비 9억여 원이 투입된 <누들로드>(2009)는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결을 보여주었다. ‘한 알의 밀이 국수가 되어 식탁에 오르기까지 그 뒤에 숨겨진 동서문명 교류의 수수께끼를 풀어본다’라는 의도로 제작된 이 다큐는 BBC의 요리 프로그램 진행자로 세계적인 요리사이자 레스토랑 컨설턴트인 켄 홈이 진행을 맡았다. <누들로드>에서는 그동안 KBS가 역사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축적한 그래픽 역량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우리 시선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필요한 것은 ‘지금’ ‘여기’ ‘우리’와 ‘그때’ ‘거기’ ‘그들’의 차이를 파악함으로써 지금 여기 우리의 좌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KBS 문명 다큐의 계보를 잇는 <슈퍼피쉬>에서는 아이슬란드 상어 삭힘 ‘하칼’, 박테리아 증식으로 생선의 맛을 더하는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 붕어에서 내장을 빼낸 다음 소금과 밥을 섞어 발효시킨 일본의 ‘후나즈시’, 발로 밟아 내장을 꺼내 소금에 절인 캄보디아 젓갈 ‘프라혹’ 등의 발표 생선을 다뤘다. 젓갈부터 삭힌 홍어까지 다양한 음식문화를 둔 우리의 음식문화를 컴퍼스의 중심으로 해서 이를 읽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동안 일본 스시는 한반도 동해안 지역의 ‘식해’가 전해져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슈퍼피쉬> 제작진은 그보다 더 오래된 근원을 찾아갔다. 스시 문화의 핵심은 바로 생선과 벼농사, 제작진은 중국 남서부 메콩 강 상류 지역의 둥족에 주목했다. 나무통에 햅쌀로 밥을 지은 다음 소금에 절인 물고기를 넣고 술·고춧가루와 함께 발효시키는 이들의 방식을 스시의 근원이라 본 것이다. 유럽인들은 ‘물고기를 항아리에 보존하는, 악마와 같은 냄새가 나는 가공법’이라며 혀를 내둘렀던 이 가공법이 우리에게 전해져 ‘식해’가 되고 일본에서 ‘스시’로 승화하는 과정을 더 자세히 살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대작 다큐멘터리가 한 편씩 나올 때마다 되도록 계기를 만들어 인터뷰를 하는 편이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방송사에서 ‘별동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획에서 촬영, 제작에 이르기까지 PD 개인의 역량에 기댄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 다큐가 ‘다큐멘터리 2.0’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팀워크를 바탕으로 한 탄탄한 프리프로덕션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맨땅에 헤딩’ 그만하고 머리를 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