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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Oct 27. 2021

제주도 10년 백수의 철학, '지루하면 지는 거다'

산티아고 순례길 트레킹 '그냥, 2200km를 걸었다'의 저자 김응용


<'지루하면 지는 거다'라는 것이 김응용의 철학이다. 그가 지루함의 끝을 붙들기 위해 산티아고에 간 것인지, 왜 그 길을 택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백수 십 년 차를 채우겠다며 하루하루를 새롭게 사는 지루한 여정 속에서도 그는 늘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김응용 작가가 <그냥, 2200km를 걷다>를 탈고했을 때 보냈던 추천사다. 우리는 그를 김감독이라고 부른다. 이유는 단순하다. 진짜 감독(김응룡)과 이름이 비슷해서. 지금은 '어른의 여행클럽/트래블러스랩'의 제주도 여행감독으로 봉직하고 있다. 감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역할이 생긴 셈이다. 


<그냥, 2200km를 걷다>는 무작정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려는 사람에게 최고의 안내서다. 저자가 그랬다. 무작정 떠났고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을 통해 순례길 정보를 얻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작정 떠나고 싶은 곳이다. 그럴 때 이책이 손에 있다면 든든할 것이다. 아무튼 순례자를 위한 산티아고에 대한 모든 것이 수록되어 있다. 



김감독은 올해로 백수 9년 차다. 이만하면 이제 일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말해도 그는 요지부동이다. 백수 10년을 채우겠다는 것이다(그게 그럴 일인가?). 암튼 그는 오늘도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산다.


김감독의 백수신공을 확인했던 적이 있다. 운영하던 회사를 엑시트 하고 백수 3개월 차에 접어든 지인과 제주에서 함께 캠핑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에게 초보 백수에게 한 말씀 내려달라고 하자, 그는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지루하면 지는 거다'


초보 백수가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나"라고 여쭙자 김감독은 간단하게 디렉션을 주었다. "규칙적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초보 백수는 "그게 무슨 소리냐?"라고 되물었다(나도 궁금했다). 그는 답했다. "불규칙하게 살면 멍해진다. 멍해지면 따분해진다. 따분하면 지루하고 지루하면 지는 거다"



하지만 백수 생활이 길어지면서 다소 지루해 보이는 눈치다. 그래서인지 내가 제주에 내려갔을 때 공항에 픽업하러 오는 역할을 맡는다(1편의 50대 초반 김C가 이 권리를 노리고 있는 듯하다). 반가움 반 귀찮음 반으로 그는 나를 맞는다. 매번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오지만 그래도 그가 내미는 제주 트레킹 밥상은 매번 특별하다.


그런 그에게 따로 줄 건 없고 해서 나는 여행감독 작위를 주었다. 그런데 둘러보니 그런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 마을 어른들도 그를 그냥 시켜먹기 뭐했는지 '추진위원'이라는 작위를 주었다. 어디어디 조합의 이사요, 어디어디 모임의 운영위원이요, 작위가 넘쳐났다(돈은 없고, 엣다 작위나 먹어라?).  


내 일정이 비는 타이밍이 있으면 김감독은 나를 제주의 계곡에 데려간다. 노출된 계곡이 아니라 숨은 용암계곡이다. 나는 짐짓 귀찮은 듯(하지만 속으로는 호기심 만땅으로) 따라간다. 나는 여행가들이 '숨은 비경'이라고 말하는 걸 개소리라고 흘려듣는 타입인데(너한테 들킨 게 무슨 숨은 비경이니), 그가 안내하는 곳은 인정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용암계곡을 답사할 때 다른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의 일행들도 김감독에게 감화를 받아서 제주에 오면 그를 찾곤 한다. 그리고 계곡 탐사를 하곤 한다. 그들을 소개해 놓고서 나는 그에게 사람 가려서 받으라고 말한다. 그에 대한 걱정 반, 나에 대한 걱정 반에서 하는 소리다. 사람에 지쳐서 내가 갔을 때 피할 수 있으니.



김감독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처음 제주에 전원주택을 짓고 내려와서 주변 사람들에게 제주 오면 연락하라고 했더니 와이프의 초등학교 동창이 30년 만에 연락을 해서 애 둘을 데려와서 일주일을 소란 피우다 갔다고, 와이프의 영어학원 강사는 내려와서 숙박만 한 것이 아니라 내내 차량 안내를 받고 갔다고. 그 뒤에는 손님 안 받는다고.


그의 호의를 독점해야 하는 나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따로 줄 것도 없는데). 그래서 '캐리어도서관 시즌4 공동 운영위원장'이라는 작위를 하나 더 부여했다. 하지만 작위 부자인 그는 시큰둥했다(다음번에 제주에 갈 때는 뭐라도 들고 가야겠다). 그래도 열심히 '올레를 책칠하자'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산티아고에는 왜 갔어?" "그냥 갔어."

"프랑스길만 완주하지 왜 2200km를 걸었어?" "그냥 걸었어."

"산티아고 책 많은데 왜 썼어?" "그냥 썼어." 


맞다. 인생에 왜가 어딨나? 그냥 살아지는 거지. 이번 주말 제주에서 김감독의 출판기념회를 할 예정이다. 물론 특별한 준비는 없다. 그냥 사람들 모이면, 술 마시고, 술 마시면 화롯불 피우고, 화롯불 피우면 살짝 책 얘기도 하면 되지. "출판기념회는 왜 해?"라고 물으면 나도 이렇게 답할 테다. "그냥, 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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