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소비는 합리적이지 않다.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면 허비하게 된다.’ 여행을 기획하면서 신중년을 위해 정립한 여가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인생의 어느 나이에 이르면 더이상 합리적 소비가 합리적이지 않은 국면이 온다. 소비는 허비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허비하지 않으면 절약(합리적 소비)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합리적 소비에 대한 이해는 있지만 맥락 있는 허비에 대해서는 감이 없다.
합리적 소비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이유는 합리적 소비가 여행의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행과 여가의 영역에서 가치 있는 경험이 꼭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여행에서 합리만 추구하면 내용이 싱거워진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여행도 그렇다. 허비 프레임은 이를 돌파할 수 있는 나름의 묘수였다.
여행의 영역에서 합리적 소비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수학여행과 회사 워크숍이다. 지금 신중년이 청소년 시절에 다녔던 수학여행과 직장에 다니며 다녔던 회사 워크숍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의 여행 소비 모형이다. 그 시절에는 그것이 합리적 여행이었지만 지금은 수학여행은 교육적이지 못하고 워크숍은 또 다른 업무가 되었다.
허비도 때가 있다. 재밌는 건 재밌을 때 해야 재밌다. 더 늦으면 허비할 수도 없어서 인생 자체를 허비하게 된다. 비합리적이지만 맥락이 있는 허비에 과감히 도전할 때가 신중년이다. MZ세대는 스스로 허비의 맥락을 깨쳤다. 그들이 추구하는 ‘소확행’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좋은 허비다.
문제는 신중년이다. 소확행의 저편에 ‘일확행복’이 있다. 신중년에 큰 허비를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들은 큰 만족을 얻으려다 큰 골칫거리를 얻곤 했다. ‘지금 자신에게 보상해주지 않으면 늦는다’는 자의식(혹은 무의식)이 이런 ‘일확행복’을 좇게 만드는 것으로 보였다. 맥락이 없는 허비는 무용했다.
소비에는 소비의 논리가 있고 허비에는 허비의 맥락이 있다. 허비란 여백이 있는 소비다. 논리가 아니라 맥락의 영역이다. 이런 허비에서 한류의 원천을 찾을 수 있다. 외환위기 때 ‘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외신이 비꼬았는데 넘친 샴페인 맛을 보았던 세대가 있었다. X세대 혹은 신세대로 불렸던 이들인데 가장 소비성향이 컸던 그들이 한류의 기획자가 되었다.
좋은 사회는 좋은 허비를 유도하고 나쁜 사회는 나쁜 허비를 유도한다. 왜 ‘나쁜 허비’가 나타날까? 우리의 취향에는 ‘나’가 없기 때문이다. 소믈리에 되려는 사람처럼 와인을 공부하고, 바리스타 되려는 사람처럼 커피를 공부한다. 왜? 피아니스트 될 것처럼 바이엘과 체르니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자랐으니까. 소비에 있어서도 1970~1980년대 산업사회 프레임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허비해야 할 일을 소비한다.
허비란 온전히 나와의 대화여야 한다. 허비하지 못하는 것은 자존감의 문제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내밀한 목소리에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좋은 ‘허비자’가 되기 위해서는 허비해도 된다는 자의식이 필요하다.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은 허비하게 된다. 그런 날이 오면 그냥 긁으면 된다.
자연스러운 '허밍아웃'도 필요하다. 소비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허비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일이기도 하다. ‘허비 스토리’에는 진솔한 자기 고백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면 남을 부러워할 일도, 시기할 일도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