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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Dec 03. 2021

평론가를 평론하는 법

애매하면 붙이는 접미사가 '평론가'인 듯


사실과 의견을 구분 못하는 기자처럼 평가와 기호를 구분 못하는 평론가가 있다. 아니 많다. 아니 대부분이다. 평론가 이상의 영화평을 제공하지만 스스로를 애호가라고 말하는 김세윤 작가는 그렇게 말하는 이유로 영화에 대한 감상의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로 나는 이런 사람인데 그런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이렇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평론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사람 중에 '자신의 기호'를 잣대로 들이미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많다. 아니 대부분이다. 기준이 정당하지 않은데 그 평이 정당하겠는가? 이들은 '자신의 기호'를 객관적 잣대로 눈속임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도 없다. '너는 어떤 사람이라 대상을 그렇게 보았구나' 하는 최소한의 정보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영화의 영역에서는 영화를 전공하거나 영화 관련 학회 활동 등을 통해 객관적 잣대를 제대로 공부하고 온 평론가가 제법 있지만 음식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완전 아사리판이다. 음식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얼치기 미식가가 음식평론가로 쉽게 둔갑한다. 음식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노련한 조리사에 비해 훨씬 뒤처진다. 식자재의 특성과 조리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음식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조리사들이 훨씬 조리 있게 말한다. 그 음식에 담긴 지식이 많기 때문이다. 


때로 평론가의 평이 오만해 보일 수 있다. 그 오만은 이유가 있어야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음식평론가의 오만은 이유가 협소하다. 그냥 자신의 기호다. 기호는 맞고 틀리고의 영역이 아니라 다름의 영역이다. 우리가 <수요미식회>에서 보듯이 그저 다를 뿐이다. 


이제 평론가는 그저 직업이 애매한 사람에게 막 가져다 부치는 접미사가 된 듯하다. '시사평론가'는 도대체 무엇을 평론하는 사람인가? 시사적인 사건을 평론한다는 것인가? 시사적인 인물을 평론한다는 것인가? 그것이 평론할 영역의 일인가? 나는 모르겠다. 


정치평론가들을 보자. 내가 보기에 정치평론가는 크게 네 종류가 있다. 

1) 실패한 출마자들. 선거에 떨어지고 나면 바로 정치평론가라는 이름으로 TV에 얼굴을 들이민다. 

2) 미래의 출마자들. 내가 지지하는, 혹은 나를 지지해 주었으면 하는 정치세력을 위한 해설을 하는 사람이다. 해설을 하는 것인지 소원을 비는 건지 모를 사람들이다. 

3) 만담가들. 스스로는 통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보기엔 그냥 만담이다. 그나마 데이터 기반해서 해설을 하는 사람 이야기는 들어줄 만하다. 

4) 진짜 평론가들. 평론가란 평가를 하는 사람, 죽 우열을 가르는 사람이다. 우열을 가르기 위해서는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맞게 평을 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정치평론가는 아직 못 봤다.


일전에 친한 배우분이 악평에 대한 우려를 전하자, '괜찮아요, 우리는 평론가에 대해 평론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평론가에 대한 평도 두루 이뤄져야 공정한 사회가 아닐까? 가장 냉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하는 영역이 있다면 바로 평론가에 대한 평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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