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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Jan 11. 2021

전두환 이순자 씨의 '몹쓸' 기록 정신

스스로의 천박함을 기록으로 남긴 그들의 아둔함이라니


윤석열 후보의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잘못한 그런 부분이 있지만,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라는 발언이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빈곤한 역사의식을 드러낸 이 말의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했다면 그의 추종자들은 이렇듯 '역사 쿠데타'를 도모하고 있다. 


얼마전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 명예 훼손 혐의로 기소되었던 전두환 씨는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선고를 받았다공판에 출석하지 않고 불성실하게 재판에 임했던 그는 다시 광주 시민들의 노여움을 샀다솜방망이 판결이라는 비판이 거셌지만 헬기 기총소사가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이 판결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옛 그림 중 허주 이징이 그린 <백응박압도>를 좋아한다. 새를 사냥해 발로 누르고 있는 흰 매를 묘사한 그림이다. 지배와 피지배를 형상화한 듯해서 이 그림을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 그림을 보면 피해자는 구차스럽고 가해자는 늠름하다. 이징이 왕족 출신의 화가라는 점과 그림의 구도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부와 명예(인기)와 권력은 부산물처럼 '폭력적 억압'을 초래한다. ‘내가 내 돈을 이만큼 쓰는데 내가 이 정도도 못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데 그럼 나 하고 싶은 대로 할래’ ‘내가 만든 판인데 내 맘대로 할래’하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은연중에 보여주고 사람들은 마지못해 그들을 배려하곤 한다. 논란이 되었던 전두환 이순자 부부의 자서전은 현대의 <백응박압도>가 아닐까 싶다.     


전두환 씨는 예전에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자작나무숲)에서 자신을 “5·18의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 됐다”라고 표현했다. 이순자 씨는 이보다 앞서 펴낸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서 “우리 내외도 사실 5·18 사태의 억울한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시정잡배들의 단골 레퍼토리인 ‘나도 피해자’를 전직 대통령 부부가 시전 하신 것이다.      


황당하지만 사실 예측 가능했던 논리다. 세상 일이 아이러니한 것이, 피해자는 자신들이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잘 모르지만, 가해자는 왜 자신이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자기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것은 속마음으로나 가질 것이니 남들에게 펼칠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의식 과잉인 이 부부는 이를 드러내고 결국 매를 벌었다.     


인도네시아 대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을 보면 가해자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피해자들이 마지막 순간 죽음의 공포에서 발버둥 친 것을 ‘구차스러웠다’고 묘사하고 때려죽이지 않고 줄로 목을 매 죽인 것을 ‘배려’라고 자랑했다. 피해자들이 피해를 숨길 때 그들은 가해를 자랑했다. 세상은 절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양심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순자 씨는 자서전에서 “우리는 김대중정부 때가 가장 행복했다. 매번 청와대에 불러 주고. 지금도 이희호 여사가 명절 때마다 선물을 보내 주신다”라고 기록했다. 저 대목을 읽으면서 사무쳤다. ‘전라도 사람은 안 된다’는 편견을 바꿔 보려고 김대중, 이희호 부부는 저들을 끝까지 인간 대접해주며 구도의 길을 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부부의 고귀함과 한 부부의 저열함이 저 한마디에서 교차했다.      


이희호 여사의 회고록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명을 위해 전두환에게 찾아갔던 대목이 나온다. 그때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은 이 여사에게 각하와 악수할 때 각하의 손이 아플 수 있으니 반지를 빼라고 요구해서 뺐다고 기록한 내용이 나온다. 세상 끝까지 이기적인 그들에게 이 여사는 끝까지 인간의 도를 다하고 갔다.     


전두환 이순자 부부의 자서전은 비난받아 마땅한 내용이지만 또한 필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차라리 그들이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준 것이 고맙다. 덕분에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한 발짝 더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최고의 응징은 바로 기록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응징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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