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온천 여행, 캄차카 대자연 기행을 준비할 때 내건 카피 중 하나였다. 매일 마무리 일정을 온천으로 잡고 동선에 적합한 온천을 골라 넣었다. 7월 중순의 여행에 온천이라니, 하지만 나는 이 일정이 캄차카 여행을 빛나게 할 ‘인간의 한 수’라고 확신했다. 답사 여행 때 경험한 날것 그대로의 온천이 주는 감동을 전하고 싶었다.
온천 중 압권은 헬기 투어 마지막에 들르는 호두트카 노천 온천이었다. 자연 개천인데 뜨거운 물이 나와서 온천으로 이용되었다. 이곳 역시 육로로는 연결되지 않고 조그만 캠프가 조성되어 있었다. 통나무 오두막이 있어서 가져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온천욕을 즐겼다. 캄차카의 노천 온천은 일본의 노천 온천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꾸며진 게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온천이었다.
온수의 공급처는 강바닥이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에서는 기포가 올라왔는데 이런 곳에 발을 디디면 진흙에서 뜨거운 기운이 발로 확 전해졌다. 온천에 이끼식물이 가득했지만 지저분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단지 사람의 손과 발을 타지 않은 증거로 느껴졌다. 태고의 신비가 가득한 이끼를 함부로 흐트러뜨린 건 아닌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곳 외에도 캄차카 여행 중에는 다양한 노천 온천을 즐길 수 있다. 삽으로 파낸 것 같은 온천도 있고 워터파크 형태로 개발된 온천도 있다. 이런 온천은 현지 러시아인과 친근해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러시아인들은 겉은 딱딱하고 속은 부드러운 러시아 흑빵 같은데, 탕 안에서는 그들의 부드러운 일면을 볼 수 있다. 러시아의 다른 도시 사람들과 달리 캄차카의 러시아인들은 여유가 있고 정이 많았다.
여행 중 여러 번 캄차카 사람들의 친절을 경험했다. 마트에서 동전이 모자란 것을 보고 옆에 와서 내주는 청년도 있었고, 캄차츠키의 남산이라 할 수 있는 미센나야 전망대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차에 태워주는 아저씨가 있었다. 캄차카는 사람이 귀한 곳이라 사람을 친절하게 대한다고 했다. 캄차츠키에서는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신호가 없어도 사람이 지나가면 기다려주었다.
캄차카의 노천 온천이 가장 유용한 때는 화산 트레킹을 한 뒤다. 설산 트레킹 뒤의 온천욕은 대자연의 운기조식이다. 캄차카 사람들은 시내에서 보이는 화산을 ‘AAA’ 등급의 산이라고 한다. A자 모양의 화산이 연달아 있다는 의미다. 산의 생김새가 준수한데 후지산과 비슷한 산 5개가 연달아 있다. 그중 으뜸이 아버지의 산 코략스키(3456m)와 어머니의 산 아바친스키(2751m)다.
코략스키와 아바친스키 화산은 전문 산악인이 아닌 사람이 오르는 것은 조금 벅차다. 우리 일행이 택한 곳은 코략스키와 아바친스키 사이에 있는 낙타 혹 모양의 봉우리를 오르는 낙타봉이었다. 낙타봉은 그리 높지 않지만 오르고 나면 준수한 두 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분이 든다. 정상에서는 광활한 캄차카의 평원이 보인다. 그 뒤에는 아바차 만이 있고 그 뒤에는 또 다른 설산(빌루친스키)이 있다.
낙타봉 트레킹을 할 때는 요령이 필요하다. 굵은 모래 크기의 화산재가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바닷가 모래사장을 밟는 것처럼 발이 푹푹 빠져서 능선으로 오르려면 힘이 든다. 옆으로 사선으로 오르는 것이 좋다. 대신 하산할 때는 미끄러지듯 내려오거나 눈 위로 썰매를 타듯 쉽게 내려올 수 있다. 화산재 아래에서는 만년설을 관찰할 수 있다. 자세히 들어보면 물 흐르는 소리도 난다. 만년설 아래 조그만 물줄기가 있다.
화산 트레킹을 경험했다면 이제 화산 가까이로 더 다가갈 차례다. 헬기를 타고 활화산을 관찰하는 방법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무트놉스키 간헐천 트레킹을 택한다.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화산에 접근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무트놉스키 화산 및 계곡에서는 마그마에 데워진 지하수의 증기가 끝없이 치솟아 오른다. 그 증기를 식히려는 듯 만년설 녹은 물이 폭포를 만들며 떨어지는데 장관이다.
무트놉스키 간헐천 계곡에 가기 위해서는 빌루친스키 화산 바로 아래에 있는 전망대를 지나게 된다. 이 전망대는 빌루친스키 화산을 비롯해 이곳을 둘러싼 화산을 360° 조망할 수 있어서 대자연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느낌을 준다. 전망대까지는 나무도 많고 다양한 들꽃도 피어 있다. 이곳을 지나면 본격적인 툰드라 기후의 식생대로 들어선다. 툰드라 기후대를 지나면 돌과 화산재뿐인, 마치 화성의 어느 곳 같은 데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곳에 간헐천 계곡이 있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낙타봉 트레킹 때와 마찬가지로 덤프트럭을 버스로 개조한 듯한 6륜 구동 버스 ‘카마즈’를 탄다. 흔들림이 엄청 심하다. 계곡에 도착하기 직전에는 화성 탐사선이 지날 것 같은 바위 언덕을 지난다. 이때 버스가 풍랑에 흔들리는 돛단배처럼 흔들린다. 멀미가 날 무렵 창을 열면 진한 유황 냄새를 맡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무트놉스키 간헐천 계곡이다.
운이 좋지 않았다. 비가 몰아치고 바람이 거셌다. 방수 바지까지 입고 완전무장한 건장한 체격의 러시아인들이 내려오고 있기에 물어보았더니 바람이 세차서 트레킹을 포기하고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차에 오르는 그들 뒤로 바람에 넘어진 안내판이 보였다. 가장 특별한 체험으로 꼽히는 간헐천 계곡 트레킹을 하지 못해 아쉬웠다. 다행히 운전사가 만년설 녹은 물이 만든 폭포를 볼 수 있게끔 차를 이동해주어서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바람이 너무 세차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였지만, 만년설 사이로 흐르는 폭포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화산 트레킹 외에도 캄차카에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가 많다. 100㎞가 넘는 강이 100개 이상이라 래프팅의 성지로 꼽히고 래프팅 후에는 연어 낚시도 할 수 있다. 스키(헬기 스키도 가능하다) 크로스컨트리를 비롯해 온갖 설상 레포츠를 즐길 수 있는데, 특히 개썰매 경주가 유명하다. 패러글라이딩, 서핑, 다이빙 등도 가능하다. 우리 일행은 바다 크루즈와 바다낚시를 했다.
바다 크루즈는 아바차 만을 가로질러 나가서 스타리치코프 섬을 돌고 오는 코스다. 아바차 만은 대체로 잔잔한데 바다와 도시, 설산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뒤로한 배는 거칠고 도도한 북태평양으로 들어간다. 아바차 만을 빠져나올 무렵 쓰나미를 막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 형제 바위를 만난다. 삼 형제 바위를 지나 다시 한참을 달리면 유네스코가 지정한 해양조류 보호구역 스타리치코프 섬에 이른다.
바닷새가 두루 서식하는 곳으로 섬을 둘러싼 기암절벽에서 바다사자를 비롯해 대형 바다 동물을 볼 수 있었다. 섬 바로 옆에서 바다낚시를 했는데 탐험가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더라도 ‘나는 지금 북태평양에서 낚시를 한다’는 사실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낚시를 하는 중간에 코스 요리처럼 계속 해산물 요리를 내주고 뜨끈한 국물로 추위를 달래주었다.
캄차카에서 가장 자주 먹는 생선은 단연 연어다. 연어 스테이크, 연어 지리, 연어 수프, 연어알(레드 캐비어) 요리 등 연어로 만드는 거의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 연어 수프가 특히 좋았다. 연어 말고 챙겨 먹을 만한 것은 바로 킹크랩이다. 캄차카에 오기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프린스’ 크랩을 먹고 실망했는데 여기서는 정말 ‘킹’ 크랩이 나온다. 한 마리가 큰 쟁반 하나를 가득 채운다. 살이 꽉 차 있어서 ‘밥 대신 킹크랩을 먹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연어와 킹크랩 외에 캄차카에서 새로 정을 붙인 음식은 말린 생선, 절인 생선 그리고 훈제 생선이다. 생선 가공에서 하나의 경지에 이른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우리는 보통 생선을 통째 말리지만 이곳은 부위별로 나눠서 말리고 염도도 구분한다. 염도가 낮은 말린 생선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캄차츠키 시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이런 생선을 파는 가게와 펍이다. 갖가지 말린 생선, 절인 생선, 훈제 생선과 더불어 오직 맥주만 파는 가게와 펍이 있다. 호텔 근처에도 이런 곳이 있어서 말린 킹크랩, 말린 가자미, 훈제 광어 등을 사 먹어보았다. 그중 압권은 훈제 광어였다. 상당히 큰 광어를 크게 토막 내서 훈제했는데 식감이 좋고 염도가 낮아 거의 매일 밤 먹었다.
이 밖에 캄차카의 전통 음식으로는 이곳의 풍부한 베리(딸기류 열매)를 이용한 ‘키릴카(일종의 베리 덮밥)’와 ‘톨쿠샤(베리와 연어 살을 버무린 샐러드), 다진 생선을 넣은 감자전 ‘텔노’, 그리고 연어알을 구운 ‘처르처칸’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러시아 극동지역과 마찬가지로 고사리가 지천이라 반찬으로 고사리무침이 나오는데 정말 맛있었다.
캄차카 기행은 시내 산책을 하며 마무리하는 게 좋다. 아바차만에 인접한 미센나야 전망대(381m)에 오르면 코략스키와 아바친스키 화산, 아바차 만 건너 빌루친스키 화산 그리고 북태평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묵었던 호텔보다 오히려 화산에서 멀어졌는데 산이 더 크게 보였다. 여기서 지나온 여정을 되짚어보면서 캄차카의 여운을 마음 깊이 간직할 수 있다.
이번 캄차카 기행에서는 방문하지 못했지만 캄차카에는 코략스, 이텔만, 에반스, 캄차달스, 축치 등의 토착민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 집과 복식이 대략 에스키모와 비슷하다. 이들이 사는 마을도 여행자들에게 개방하는데 스위스 산촌과 닮은 에소 마을이 유명하다. 토착민 마을에서는 시베리아 지역의 토템과 샤머니즘을 볼 수 있다.
캄차카는 대자연에 압도당하고 싶은 사람에게 꼭 권하고 싶은 곳이다. 캄차카는 생각보다 가깝다. 직항은 없지만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롭스크를 경유하면 비행기로 6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항공료도 저렴한 편이다. 다만 호텔 등 여행 인프라가 잘 발달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다른 곳과 비교가 불가능한 압도적인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곳이다. 모험가와 탐험가를 선망하는 사람이라면 꼭 가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