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과 함께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카페에 들어서는 사람을 보고 지인이 아는 척을 하려다 마는 모습을 보았다. 상대방도 비슷했다. 아는 척을 하려다 머뭇거리기에 아는 사이냐고 물었더니 지인은 ‘쉬는 사이’라고 답했다. 예전에는 자주 만나고 함께 도모하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소원해진 사이라는 것이다.
‘쉬는 사이’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름 편리한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친했다가 요즘엔 소원해진, 그런 애매한 사이를 ‘쉬는 사이’로 간주하기로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새해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는 사이, 카카오톡에 생일이라고 뜨는데 축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지는 사이를 규정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쉬는 사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특별히 다투거나 멀어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소원해진 사이가 제법 되었다. 바쁘게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왕왕 있게 마련이다.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 만난 사람은 그 '계기'가 없으면 만날 이유가 없어서 멀어지곤 했다.
누구를 알다 멀어지는 것은 마음 불편한 일이다. '왜 그 사람들과 멀어졌을까?' 되새겨보곤 한다.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과 멀어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과 20년 전 수첩을 꺼내 보니 그때 주로 만나던 사람들과 지금 만나는 사람은 완전 달라져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들과 멀어진 것일까...
사람과 사람이 멀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물리적으로 떨어져서도 그렇고, 공동의 접점이 사라져서이기도 하고, 관심사가 달라져서이기도 하다. 어쨌든 멀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목적하는 일에 집중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면서 그들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멀어지는 패턴을 분석하면 인간관계의 허비도 줄일 수 있다. 어차피 멀어질 사람에 쓸데없이 품을 들이지 않을 테니...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노력이 부족해서도 인격이 모자라서도 아닌, 그냥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산과 들의 환경에 최적화된 나무와 풀이 살아남듯 나랑 가장 맞는 사람들이 남는 법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맞춰주려는 노력보다 맞는 사람을 찾는 노력이 더 의미 있다. 맞춰주려고 들인 노력은 상대방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과정이었을 뿐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아는 사이’를 유지하고자 유지 보수 비용을 너무 많이 들인다. 예식장과 장례식장에서, 송년회와 정기 모임에서 영혼 없는 인사를 전할 때가 그렇다. 큰 노력을 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이 나랑 잘 맞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맞춰주려고 가는 곳이 많다. 부질없는 짓이다.
나이가 들면 입맛이 변하듯이 자신과 맞는 사람도 달라진다. 커피콩으로 치면 내가 생두일 때 만난 사람과 원두일 때 만난 사람 그리고 제대로 로스팅되어 만난 사람이 다 나를 다르게 본다. 과거의 이미지에 갇혀 지금의 나를 풍부하게 보아주지 않는 옛사람들이 제법 있다. 친구는 옛친구가 편하다고 하지만 보다 완성된 지금의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과의 만남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과거는 아름답지만 기억은 고쳐쓸 수 없다. 과거의 이미지에 갇혀 지낼 이유도 없다. 내가 누군가와 소원해졌다고 해서 섭섭하게 하지 않았나 반성할 일도, 혹은 내게 연락을 안 한다고 섭섭해할 일도 아니다. 그럴 시간에 지금 내가 누구를 만나야 가장 행복한지 고민하는 것이 낫다. 그러기에도 인생은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