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잘 나가던 세무변호사 노무현은 거리로 나왔다. ‘부산판 학림사건’이라는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부터였다. 젊은 청년들의 부당한 불행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들의 변호를 맡으면서 노무현은 거친 세상에 뛰어들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막 집권을 시작한 무렵의, 서슬 퍼런 시절이었다.
서른다섯, 청년 노무현은 과감히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아들 건호는 여덟 살 딸 정연이는 여섯 살 때 일이었다. 인권변호사의 길은 쉽지 않았다. '고 박종철 군 국민 추도회'에 가담했다가 연행되기도 했고, 대우조선 사건 때는 구속이 되기도 했다. 변호사 업무 정지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거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바보였다. 우리를 한 없이 부끄럽게 만든 바보였다. 그는 실패한 자 가운데 가장 희망적인 사람이었고, 성공한 자 가운데 가장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권력을 가진 자 가운데 가장 권위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바보다.
우리는 원칙을 지키려던 그를 무능하다 놀렸다. 그를 비켜간 허물을 당신의 허물이라 우겼다. 그렇게 우리는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런 우리에게 그가 말한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오늘 우리의 삶에 충실하라고. 그리고 오늘 우리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라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라고.
실용이라는 이름의 영악함이 판을 치는 세상, 그 이기심의 정글에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그냥 침묵하기에는, 무언가 부끄러운 마음이 들 때, 그가 생각난다. 1981년, 그 부끄러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묵묵히 거리로 나갔던 그처럼, 그를 기억하며 세상과 좀 더 적극적으로 만나며 살았다. 그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나도 노무현을 좋아했다. 당장의 실리보다 명분을 좇는 그의 ‘바보 정치’가 좋았다. 그리고 ‘명분 있는 패배’를 통해 그가 만들어내는 ‘역전 드라마’를 좋아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할 때는 드러내 놓고 좋아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할 때는 드러내지 않고 좋아했다. 그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때도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 되자 정을 떼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대통령이었고 나는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언론 종사자였기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좋아할 수 있었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좋아할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필연적인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내 생각과 다른 것이 많았다. 정을 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그와 5년간 이별하고 퇴임 후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다시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 콘서트는 무산되고 성공회대에서 출연진이 바뀌어 개최되었다.
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세 번 만났다. 낙선한 그가 정치 낭인으로 지내던 시절 한 번, 대통령 후보 시절 한 번, 그리고 퇴임 후 한 번, 그렇게 세 번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세 번의 만남 동안 느꼈던 것은 노무현은 누구보다도 자기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와의 만남에서 나는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그의 자살이 낯설었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한 시민단체에서 주최한 대학생 대상 강연회였다.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무모한 출마를 거듭하던 그는 자신이 왜 ‘낙선의 달인’이 되어야 했는지, 그 의미를 담담하게 전했다. 그때 그의 모습은 ‘아름다운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강연과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그는 내내 당당했다. 그가 표를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는 성공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그에게서 때로 인생의 패배가 승리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배웠다.
두 번째 만남은 아주 짧았다. 16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당사에 지원 취재를 갔다가 대통령후보실 옆 화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잠깐 마주쳤다. 함께 서서 오줌을 누었다. 그 불편한 자세에서 그와 목례를 나누었다. 지지율이 떨어져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환했다. 나중에 LA 노사모를 취재할 무렵 그가 후보 단일화를 이뤄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기념촬영을 위해 비워둔 자리에 앉지 않고 어르신들 뒤에 섰던 고 노무현 대통령.
마지막 만남은 봉하마을에서 이루어졌다. 역시 길지 않은 만남이었다. 사저 앞에 도착했을 때, 방문객과 대화를 마친 그는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퇴임 뒤 다시 인기를 회복한 그는 누리꾼에게 ‘노간지’라 불렸다. 이를 시기한 여당 의원과 보수 언론이 그의 사저를 ‘노방궁(노무현+아방궁)’이라며 비꼬았지만, 직접 본 사저는 소박했다.
그날 사람들이 그를 왜 ‘노간지’라고 부르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 방문객과 기념사진을 찍고 난 뒤 그는 단체 방문한 요양원 어르신과 사진을 찍기 위해서 자리를 옮겼다. 어르신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기다리던 어르신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하고 그는 조용히 뒷자리에 가서 섰다. 앞자리 가운데에 그의 자리를 비워두었지만 자기 자리를 어르신들의 뒤라고 생각한 그는 뒷줄에 섰다. 고향으로 내려간 그가 진정 낮은 곳으로 임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날은 볕이 좋은 가을날이었다. 그날 노사모 회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 앞에서 방문객을 대상으로 즉석 투표를 벌이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안한 오리농법으로 재배한 쌀의 포장 디자인을 골라달라는 것이었다. 참 아름다운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을 앞두고 노사모에서 판매하는 봉하오리쌀을 열 봉지나 사서 몇 봉은 주변에 선물하기도 했다.
기자 생활을 할 때, 중요한 판단을 할 때 '바보 노무현'을 떠올리곤 했다. '그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생각해보곤 했다. 여행감독이 되어서 지금은 다른 판단과 다른 결정을 내리지만, 여전히 '사람 사는 세상의 여행'이 내가 지향하는 여행이다. '여행에서 만난 사이'가 남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자전거를 타고 봉하의 들판을 달리며 그가 누렸을 상쾌한 기분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