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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Dec 31. 2020

말라카 기행 2편,  이슬람의 개방성을 체험하다

쑨원과 마호메트와 마히티르의 도시를 가다

  

생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하는 것이 정치”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여행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여행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하지만 말초적인 쾌락만 꾀하면 금세 지겨워진다. 서생적 문제의식을 품은 여행은 조금 더디지만 뭔가 캐나 가는 재미가 있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APOCC) 원장(전 국립 해양박물관장)과 함께 기획했던 ‘메이지유신 기행’과 ‘말라카 기행’이 그랬다. 주 원장님이 여행감독을 맡고 나는 여행프로듀서 격으로 보조했던 여행인데 ‘해양 문화 탐방’이라는 대주제로 여행의 줄기를 잡으니 스케줄이 탄탄했다.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단가를 낮추는 감각도 남달랐다. 옆에서 많이 배웠다.      


2016년 초 마호메드의 도시 쿠알라룸푸르, 정화의 도시 말라카, 쑨원의 도시 페낭, 마하티르의 도시 랑카위를 두루 탐방했다. 전편에 말라카는 이미 언급했는데, 기억을 파는 도시였다. 융성했던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은 싱가포르에 빼앗기고 이제는 관광지로 안착해 있었다. 동서교류의 흔적은 융합된 문화로서 관찰할 수 있었다. 융합의 기억 덕분인지 말라카인은 융합의 문화를 체화시켰다. 그것이 무엇이든, 좋은 것이면 취한다는 개방성이 돋보였다.      



# 쑨원의 도시, 페낭     


페낭의 바다는 생각보다 맑지 않았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뻘이 많아서 바다색이 조금 탁한 편이었다. 휴양지라고 보기에는 도시가 너무 발달해 있었다. 쑨원이 신해혁명의 기반을 다진 도시 페낭은 말라카보다 영악했다. 중계무역의 기능을 싱가포르에 빼앗겼지만 그들은 전자산업으로 지정학정 특징을 잘 살려냈다. 교역이 유리한 이점과 휴양 도시 특유의 장점을 살려 글로벌 기업의 리서치센터를 유치했다.     


페낭은 제주도의 4분의 1 크기지만 인구는 제주도의 두 배가 넘는다(현재 150만 명 정도). 우리는 잘 모르지만 페낭은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 통하는 도시다. 각종 지원제도를 제공하는 자유산업단지에 인텔, 모토롤라, AMD 등의 다국적 전자기업들이 R&D 센터를 구축해 두었다. 그래서 페낭은 외국인 노동자가 가장 많은 도시로 꼽힌다. 우리 교민도 2천여 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등록된 교민은 900여 명 정도).      


이 페낭시의 중국인 비율은 70%가 넘는다고 한다. 제티 수상가옥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이 중국인들은 이제 페낭시의 고층아파트들을 두루 점유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이주는 집단 이주였다. 페낭에도 ‘구 씨 집성촌’을 비롯해 여러 집성촌을 볼 수 있다. 각각의 집성촌은 각자 한 가지 산업을 특화시켰고 조상을 모신 사당을 구심점으로 뭉쳤다. 화교가 어떻게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안착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페낭항은 싱가포르에 버금가는 동남아시아의 물류허브로 거듭나고 있다. 말라카가 단순히 관광도시로 머무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페낭은 원래 서구 열강이 아시아에 진출할 때 인도의 고야를 출발한 배가 반드시 정박하던 항구였다. 페낭에는 현대건설이 만든 총연장 13.5km의 페낭대교가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 CEO 시절 건설한 바로 그 다리다. 그런데 다른 쪽에 중국 기업이 만든 현대식 대교가 있어서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중국의 번창은 페낭에서도 확인되었다.     


페낭의 조지타운에서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을 떠올렸다. 마치 바둑의 포석을 하듯 영국은 페낭 싱가포르 등 해양 거점이 되는 섬들을 점령해 갔다. 그것은 포르투갈이 이미 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마치 대륙과 본섬의 멱을 짚듯 섬을 점거해갔다. 거문도에 포석을 둔 그들이 노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유서 깊고 사연 많은 도시 페낭에서 답사단의 일원인 강영민 작가가 평화의 퍼포먼스를 벌였다. 아세안 10개국 국기(현재 말레이시아가 아세안의 대표다)와 동북아 4국(중국 몽골 한국 일본)을 흔드는 사람들 앞에서 제주도 한라산에 내린 눈을 녹인 물과 제주도 앞바다의 바닷물을 섞은 물을 코코넛 그릇에 담아 동인도회사 마크가 붙은 포르투갈 요새의 녹슨 대포 포신에 뿌렸다.   


   


# 마호메트의 도시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는 1990년대에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인구 과밀화를 막고 분산시키기 위해 행정 수도인 푸트라자야를 새로 설치했다. 그러나 여전히 쿠알라룸푸르가 말레이시아의 중심이다.      


이 쿠알라룸푸르에서 낮 동안 돌아다닌 곳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이슬람아트뮤지엄이었다면 밤에 돌아다닌 곳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부키트 빈탕이 밤거리였다. 자유분방하게 무슬림 남녀가 어울리는 모습은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을 깨 주었다. 청바지를 입은 마호메트를 보는 기분이었다.      


쿠알라룸푸르의 화려한 밤은 다양한 종교의 말레이시아인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리도록 만들었다. 가장 융합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바로 종교다. 2010년 말레이시아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61.3%가 이슬람교를 믿으며, 19.8%가 불교, 9.2%가 기독교, 6.3%가 힌두교, 1.3%가 유교, 도교 등의 전통 중국 종교를 믿는다.      

쿠알라룸푸르는 다종교의 도시였다. 이슬람 사원 옆에 불교 사원 그 옆에 힌두교 사원이 있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나라가 바로 쿠알라룸푸르였다.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사회인 말레이시아는 우리에게 ‘이슬람과의 공존'과 관련해서 힌트를 준다.     


말레이시아의 정치 체제에서 눈여겨볼 것은 중국계에 경제력으로 뒤진 말레이계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말레이시아의 정치 체제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체제와 유사하다. 부미푸트라(말레이인 또는 말레이시아 내 원주민)를 중국인이나 인도인 등 비부미푸트라보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말레이계의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이다. 이런 부미푸트라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인들의 안전을 담보해 주는 방식으로 인종 갈등을 완화하고 있다.      



# 마하티르의 도시, 랑카위      


말레이시아의 지도자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바로 마하티르 전 총리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외환위기를 맞았지만 마하티르는 ‘독자생존'의 길을 택해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이 마하티르가 모델로 삼은 나라가 일본과 한국이었다. 그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일본과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우자"라는 ‘향동학습정책(向東學習政策, Look East Policy)’을 내세웠다.      


마하티르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말레이시아의 정치력이다. 다양한 지배자들을 경험하면서 말레이시아는 정치의 중요성에 일찍 눈을 떴다. 1967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와 함께 ASEAN의 결성을 주도한 나라가 바로 말레이시아였다. 마하티르는 국제무대에서 국력이 약한 나라를 대변하면서 영향력을 키웠다.      


랑카위는 그 마하티르의 고향으로 그가 말년에 안착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랑카위를 국제 기준에 맞는 휴양도시로 가꿔 말레이시아의 미래를 구현했다. 정찰제로 바가지요금을 없애고 영어로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 랑카위를 국제적인 휴양지로 키웠다.      


이번 주변 국가로만 본 말레이시아를 ‘아시아 역사의 주체'로 보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철기문명 유적지 답사였다. 기원전 5세기경부터 철기를 생산한 곳으로, 동남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철기문명 유적지 발굴 현장을 방문했다. 보로부두르와 앙코르와트 전에 강력한 철기 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적지다. 신전이 있어서 종교가 있었다는 것을, 철기를 생산하는 산업이 있었고, 이를 운송하는 무역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적지 답사는 고대사의 퍼즐을 푸는 듯해 흥미로웠다. 대체로 10만 명 정도의 농업 기반의 계급사회인 도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탄소 연대 측정을 위해서 세 곳에 시료를 보냈는데 그곳 중 한 곳이 한국(그 외 미국과 일본)이었다고 한다. 오랜 옛날 세계 어느 곳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문명을 만들어냈던 말레이인의 DNA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말레이시아인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이 답사 여행의 화룡점정이었다.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도시를 돌고 난 뒤에 ‘레바논’에 가고 싶어 졌다. 왜냐하면 유흥지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레바논 카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드록카페’가 있어야 할 자리에 비슷한 비주얼로 ‘레바논 카페’가 있었다. 이슬람인에게 레바논의 이미지가 그런 듯했다. 그래서 레바논의 열정을 맛보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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