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음식에 대한 원고를 써주시라, <CULTURA>의 원고 청탁에 처음 드는 생각은 '내가? 어림없지!' 하는 것이었다. 쿠바 음식에 대한 원고를 쓰기에는 쿠바에 대한 지식도, 음식에 대한 조예도, 쿠바의 여행 경험도 많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쓰겠다고 한 이유는 쿠바에 대한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해서다. 쿠바음식 전문가는 아니지만 쿠바음식과 음식문화에 대한 접근을 통해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질 수 있다고 보았다.
사람들이 국내여행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해외여행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 해외여행 이야기를 할 때는 여행지의 풍경이나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의 사연을 주로 말한다. 그런데 국내여행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기승전-맛집으로 종결된다. 여행지 정보를 물을 때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가볼 만한 곳을 묻다가 결국 맛집이 어디냐는 질문으로 마친다.
여행은 늘 역설이다. 말이 통하는 곳인데 사람과의 소통이 없고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오히려 소통의 경험을 소중히 한다. 그렇게 음식을 중하게 생각하는 민족인데, 랍스터가 지천이라는 쿠바인데, 쿠바의 식경험을 돌이켜보면, 인상적인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주된 감상이다.
이유는 이렇다. 모든 음식점을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점에서 공연된 음악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음식점에서 공연되는 음악이 수준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뭔가 깨달음에 가까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 수준급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 배도 채워주었구나’. 음식과 음악의 주와 종이 바뀐 셈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레스토랑에 들어설 때마다 테이블이 아니라 무대에 관심이 갔다. ‘이곳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게 될까’가 아닌 이곳은 어떤 음악을 들려줄까, 여기서 어떤 음악천재를 맛나게 될까, 어떤 열정을 우리에게 선사할까, 하는 기대를 품곤 했다. 빡빡한 일 정 중에 두 번이나 찾았던 트리니다드 언덕의 어느 식당도 음식이 아니라 음악 때문에 다시 찾은 곳이었다.
우리 백제의 전통을 이야기할 때,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은 쿠바인에게도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그들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스타일로 누추함을 극복했고 예술로 사치를 눌렀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 바로 높은 음악 수준을 보여주는 쿠바의 음식점이다.
쿠바에서 맛으로 기억하는 집들은 쿠바다움과 다소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차이나타운의 랍스터찜 그리고 올인클루시브의 바라데로 리조트의 화려한 음식, 하바나 관광 첫날 모로성에서 내려와 먹었던 관광식당 정도인데 공통점을 꼽으라면 쿠바다움이 덜한 곳이었다는 점이다.
쿠바의 매력을 구성하는 4대 요소를 꼽아보라면 아프리카에서 온 조상들이 물려준 소울,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긴 스페인문화의 유산인 정열, 미국 자본주의가 뿌려놓은 퇴폐와 향락, 쿠바혁명이 남긴 자존감을 꼽을 수 있다. 이 네 가지 코드는 고스란히 쿠바의 음식점에서도 나타난다. 음식점 안에는 소울이 충만하고 거리에는 정열이 그리고 가난한 노점에는 자존감이 화려한 호텔 레스토랑에는 자본주의가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쿠바 여행 중 자주 접하는 음식은 크게 세 가지였다. 닭구이, 돼지구이, 소고기 구이. 양념은 소금과 후추뿐. 이 세 가지 바비큐를 돌아가면서 먹게 된다. 요리랄 것도 없이 고기를 넓게 펴서 그릴에 대충 익혀 온다. 일행과 그런 농담을 하곤 했다. 쿠바에서 살게 되면 요리사가 되겠다고. 요리 정말 쉽게 한다고. 코드 서너 개로 모든 음악을 커버하는 기타리스트처럼 쿠바 요리사들은 이 세 가지 고기로 우리의 식단을 꾸려나갔다.
이 세 가지 육류는 다른 후진국처럼 비슷한 맛의 궤적을 보였다. 사료가 아니라 방치해서 키운 닭은 우리가 먹는 육계에 비해 웃자라서 크고 고기도 질기다. 소 역시 곡물사료를 충분히 먹지 못하고 커서 마블링이 실종 상태다. 잡식성인 돼지만이 지방이 익을 만큼 충분히 자라서 고기가 맛있었다. 그래서 주로 돼지고기 구이를 먹었다.
쿠바 음식의 완성은 그릇이 아니라 잔이다.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에 나오는 표현인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을 빗대어 묘사하면 ‘왕후의 잔, 걸인의 찬’이다. 어느 음식점에서건 만족할 만큼의 칵테일을 맛볼 수 있었다. 냉동 식자재를 조리한 패스트푸드점 요리보다 못한 음식을 내놓는 곳에서도 호텔급 칵테일을 맛볼 수 있었다.
헤밍웨이 또한 ‘내 다이끼리는 라 플로리디따에, 내 모히또는 보데기따에 있다’라며 주점을 중심으로 하바나를 기억했지, ‘내 스테이크는 어디에, 내 푸아그라는 어디에 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쿠바에서 음식은 그저 거들뿐. 누구와 함께 하느냐, 어떤 음악을 듣느냐, 어떤 칵테일을 마시느냐가 중요하다.
다시, 여행은 역설이다. 쿠바 음식도 역설이다. 음식 외에 모든 것을 탐할 수 있는 곳이 쿠바다. 문학과 예술과 관능, 삶의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하지만 음식은 아니다. 물론 올드 하바나의 몇몇 힙한 레스토랑은 파인다이닝 수준의 멋진 정찬을 선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권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쿠바답지 않으니까. 굳이 쿠바에서, 왜?
그렇다면 쿠바다움이란 무엇일까? 쿠바여행을 하고 나면 이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다. 우리를 쿠바로 이끄는 것을 꼽아본다면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 그리고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정도다. 하지만 쿠바에 다녀온 사람들은 더 많은 이름을 얻어온다. 모히토가 아니라 다이끼리로 하바나를 기억하듯이 말이다.
쿠바인들이 국부로 여기는 독립운동가 시인 호세 마르티의 '관타나메라'의 구절을 읊조리고, 자신의 이름보다 체 게바라의 이름을 앞세우고 그의 우상을 섬기는데 관대했던,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며 사자후를 토했던 피델 카스트로의 자존감, 호텔 라운지에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이름으로 연주하는 밴드보다 뒷골목 이름 없는 밴드가 선물한 멋진 순간으로 쿠바를 기억하게 된다.
쿠바 음식의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쿠바 음식점은 너무 그립다. 거기서 넋을 놓고 빠져들었던 음악, 너무나 여유롭게 환담하던 쿠바 사람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행들과 함께 감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했던 이야기와 몸짓들, 사무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