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 구매력 지수는 한국이 더 높다, 그러니 한국이 일본을 앞섰다?라는 착각은 후쿠오카 시내의 화려한 불빛에 산산이 녹아내렸다. 일본 5대 도시 안에도 들지 못하는 후쿠오카의 밤거리가 서울보다 몇 배는 더 화려했고 활력 있었다. 버블 경제 시기에 지어졌을 다양한 쇼핑타운도 서울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비유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이 기와집에 사는데 벌이가 시원찮아진 사람이라면 한국은 초가집에 살다가 벌이가 좀 좋아진 사람 정도로. 씀씀이야 언제든 늘었다 줄었다 할 수 있는 것이고, 일본 말로 ‘와꾸’에서 아직은 우리가 한참 뒤졌다. 일반 지방 소도시의 자기 완결성을 보면 우리와 격차가 현격하다.
코로나19로 막힌 2년 그리고 아베정부의 무역제재로 인한 1년, 도합 3년 만에 일본을 가서 느낀 것은 여전한 격차였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 때 외신이 한국을 두고 '샴페일을 너무 일찍 터뜨린 나라'라고 했는데, 여기에 빗대어 일본을 표현하자면, '샴페인을 너무 많이 사 둔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잃어버린 30년'이라는데 아직도 잃을 게 남은 것 같다.
‘료칸 대탐험 시즌1 - 쿠로카와 온천마을’을 마치고 여행자들을 후쿠오카 공항에서 보낸 뒤에 홀로 남아 1박2일을 더 보냈다. 여행감독에게 보상 같은 시간이다. 호텔에 체크인하고 잠깐 낮잠을 잔 뒤에 시내를 두리번거리다 만난 곳은 하카타역의 크리스마스마켓이었다. 지난 동유럽 답사에서 익숙해진 크리스마스마켓을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요기를 위해 하카타 역사 식당가인 쿠텐을 찾았다. 지인이 알려준 곱창전골집에서 뜨끈한 곱창전골을 한 그릇 해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찾지 못했다. 그러다 오이스터바를 발견했다. 굴을 먹으면 배가 덜 불러 다른 음식을 한 번 더 맛볼 수 있을 것 같아 그곳으로 들어갔다.
우리나라 굴 요릿집이라면 통영산을 자랑하고 굴국밥과 굴찜 그리고 굴보쌈 정도의 메뉴를 내놓았을 텐데 그곳은 일본에서 굴이 유명한 곳 8곳의 굴을 모두 갖추고 동서양의 다양한 굴요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당연히 소주와 페어링 했겠지만 다양한 와인을 구비하고 있어서 화이트와인을 반 병 시켰다. 훌륭한 굴플렉스였는데 그리 비싸지 않았다.
다음날은 느지막이 일어나 나카스강 일대를 산책하고 하카타항의 완간시장을 찾았다. 이곳에 유명한 110엔 초밥집이 있어서다. 초밥 한 개에 110엔이어서 우리 돈으로 1000원 정도인데 라인업이 화려하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접시당 가격에 2000원 3000원 4000원 차등을 두었을 텐데 그곳은 동일했다. 그러면서도 국내에서 접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초밥을 진열했다. 천 엔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초밥집을 나오며 문득 중국과 일본은 확실히 향유의 코드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은 향유에서 무조건적인 화려함을 지향한다. 그래서 ‘즐기고 싶어? 그럼 부자가 되라고!’라고 강요한다. 일본의 향유 코드는 그렇지 않다. ‘네가 선 자리가 어디야? 거기서 최선을 다해 즐겨 보라고!’라고 속삭인다. 모든 계층이, 모든 세대가, 모든 순간을, 모든 감각으로 즐길 수 있도록 섬세하게 이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남긴 초상을 얘기하면서 늘 들먹이는 것이 100엔숍이다. 그런데 100엔숍에 들어가 보면 허접하지 않은 물건도 제법 있다. 뭔가를 발견해내는 재미가 있다. 편의점 도시락에도 나름의 행복이 있다. 한국 편의점의 도시락보다 구색이 좋으면서도 더 싸다. 찾아보면 일본에는 ‘가난한 행복’이 즐비하다.
그런 ‘가난한 행복’이 ‘잃어버린 30년’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 아닐까 싶다. 일본도 고도성장 시기에는 중국처럼 무분별한 화려함이 넘쳤고 그 잔상이 지금 남아서 우리의 주머니를 털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는 가난한 사람도 구색을 갖추고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도록 섬세하게 배려되어 있다. 산업적으로도. 부러운 부분이다.
이어령 교수가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일본인들은 공간 안에 소우주를 만든다. 정원을 만들 때도 그 안에 돌 나무 물 흙으로 소우주를 만든다. 그 소우주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구현되었다. 이제 막 노령화 사회를 걱정하는 우리가 깊이 들여다 볼 부분이다.
3년 만이라서 그런지 일본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모든 삼킴이 좋았다. 코와 혀가 충분히 호사를 누렸다. 미식을 따로 테마로 내세우지는 않았는데 돌이켜보니 ‘미식여행’이라고 해도 손색없었다. 료칸에서 먹었던 카이세키 음식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점심에 먹은 단품 요리들도 모두 좋았다.
첫째 날 먹은 오징어회와 오징어튀김은 한국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식감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둘째 날 간 소바집은 스파게티 알덴테처럼 식감을 강하게 해서 원재료의 맛을 더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셋째 날 먹은 장어덮밥집은 기름진 장어를 더 맛있게 더 담백하게 먹기 위해 일본인들이 어떤 섬세한 고려를 하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모두 다 다른 곳에서는 못 먹어본 맛으로 입맛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일본 여행을 기획하면서 ‘어른을 위한 일본 여행 큐레이션’으로 크게 세 가지 타입의 여행을 기획했다. 1) 료칸과 미식 (쉼이 있는 웰니스 여행으로) 2) 사케 등 테마 (올봄에 ‘윤동주의 마지막 소풍’을 진행할 예정이다) 3) 트레킹 (일본의 산은 우리와 다른 매력이 있다) 일단 이 세 가지 테마로 라인업을 구성하고 있다.
‘료칸 대탐험’ 1회 차로 간 료칸은 일본에서 별 보는 마을로 알려진 호시노무라와 규슈의 대표적인 온천마을로 꼽히는 쿠로카와였다. 료칸에서는 카이세키요리와 노천온천 그리고 다다미방을 누리고 낮에는 규슈올레 구루메 코스나 고코노에의 현수교를 산책하며 여유를 만끽했다. 구루메 코스는 일본 전통 신사와 사찰을 두루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일본 특유의 섬세함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여행이었다. 앞으로도 ‘료칸 대탐험’ 시리즈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행으로 계속 풀어가려고 한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여성이 엄마 혹은 딸과 함께, 언니 혹은 동생과 함께, 친구와 함께 가기에 딱인 여행으로. 그래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바로 ‘료칸 대탐험 - 시즌2’를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