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람은 가끔 오는데 한국 사람은 처음 봐요" 콩크에 사는 한 한국인 여성에게 들었던 말이다. 콩크는 소도시가 아니라 소읍이라 불러야 할 만큼 작은 곳이다. 마을의 성당이 유명해서 관광지가 된 곳인데 그녀는 그곳에서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중에 '남프랑스 소도시기행'을 할 때 그녀의 호텔을 이용하고 싶다고 했더니 호텔 인스펙션을 시켜 주었다. 다음 여행에서의 인연을 약속하고 계속 길을 나섰다.
강가에 자리 잡은 그림 같은 고성 마을 에스탱의 어느 아틀리에에서 본 화가 역시 한국인은 처음 본다고 했다. 우리를 아뜰리에로 들인 그녀는 '프랑프랑'한 조각가 엄마의 작품을 회화로 재해석한 듯한 그녀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어머니의 영감이 장르를 달리해서 딸로 이어진 점이 인상적이었다. 서툰 영어지만 적극적으로 답하는 그녀와도 다음 여행에서의 인연을 기약했다.
저녁 스테이크에 필요한 식자재를 사기 위해 들른 에스팔리옹의 카르푸익스프레스 매장에서 만난 점원은 "안녕하세요"라고 우리를 반갑게 맞은 뒤 "감사합니다"라며 배웅했다. 그동안 익힌 한국어를 쓸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한국말 잘하시네요"라고 응원해 주고 나왔다.
협곡 위에 자리 잡은 보줄의 노천카페에서 폼 잡고 시가를 한 대 피우고 나서는데 주인이 뛰어와서 우리 일행을 붙들었다. 내가 총무의 소임을 잊고 계산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르뷔에서와 마찬가지로 7명 커피값이 10유로가 되지 않았다. 9유로 남짓. '이 물가 실화인가?'
르뷔의 '정육식당'에서도 남프랑스 물가에 놀란 적이 있다. 7명이 맛있게, 배부르게, 감탄사를 쏟아내며 식사를 마쳤는데 영수증을 보니 음식값이 고작 40유로였다(와인 두 병은 24유로). '어머, 여긴 사야 해~' 주인아저씨가 숙성고를 열고 자랑했던 숙성육 2.4kg짜리 한 덩이를 사서 나왔다.
옛 목장 농가를 개조한 지트에서 2박을 하고, 조식은 물론 저녁식사도 하고, 맥주도 20병을 시켜 먹었는데 낸 돈도 역시 감동이었다(정확한 금액은 영수증을 확인해 봐야겠다). 일본 소도시에 갔을 때 '물가가 만만하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남프랑스 소도시 역시 그랬다.
매일매일이 감동이었던 이 마을은 모두 산티아고 순례길의 ‘프랑스길’에 있는 마을 들이다. 어느 마을이든 따뜻한 '환대의 온도'를 보여주었다. 동양인 그룹 관광객에 심드렁하고 시큰둥하며 '농!'을 남발하는 리옹과 보르도의 시크한 도시 프랑스인들과는 달랐다. 따뜻했고, 정감 어렸고,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렇게 많은 한국 사람들이 산티아고 '프랑스길'을 걷는데, 한국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어찌 된 일일까? 산티아고 프랑스길의 프랑스쪽 구간은 ‘산티아고 순례길 시험범위’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프랑스 마지막 도시인 생장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이 프랑스길의 스페인 구간만 걷는다.
사람들은 생장에서부터 프랑스길을 걷기 시작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고는 '완주했다'라고 말한다. 이는 틀린 말이다. 완주가 아니라 '반주'한 것이다. 프랑스길에는 프랑스 구간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프랑스 구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프랑스인들은 이 프랑스길을 걸을 때 생장에서 스페인쪽 구간으로 넘어가기 전에 두 끼를 먹고 간다고 한다. 왜? 내일부터는 맛있는 프랑스 음식을 못 먹으니까. 그 말을 듣고 우리도 걱정을 좀 했는데, 웬걸 스페인 쪽으로 가니 우리 입맛에 더 맞았다. 특히 해산물 식자재가 풍부해서 호사를 누렸다(이 내용은 다음 편에서).
처음 '남프랑스 소도시기행'은 여행의 '부주제'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와서 <그냥 2200km를 걷다>를 쓴 김응용 작가가 프랑스길은 프랑스 구간이 더 예쁘다고 해서 이쪽을 걷는 ‘산티아고 프리퀄’을 기획했다. 한국인들이 걷는 스페인 구간에서 시작하기 전에 '맛뵈기'로 조금 걸어보자는 것이었다.
차량을 렌트해서 이동하면서 주요 소도시를 방문하고 순례길은 한나절씩만 걷기로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걷는 시간은 줄고 방문하는 소도시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여행은 ‘남프랑스 소도시 기행’이 되었다. 새로운 소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로카마두르는 압권이었다. 사람들이 '몽쉘미셀'을 프랑스 최고의 여행지로 치는데, 그에 못지않았다. 협곡 위에 자리 잡은 성당과 고성은 마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숲의 나무들은 이제 막 '연두연두'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는데 그 배경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아빌라로 가는 길에 가론강 옆으로 난 수로길은 이번 순례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대체로 프랑스구간은 고도 1200m 안팎의 구릉지대를 걷기 시작해 로강의 협곡을 거쳐 가론강의 평원으로 이어지는데, 수로에서 시작해 자작나무 숲을 지나는 이 길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보통 남프랑스 여행이라고 하면 니스 칸 아를 아비뇽 등 지중해 연안 도시들을 연상하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의 프랑스구간에 속한 도시들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개발이 별로 안 되고 보존에 주안점을 둔 곳인데 마치 중세 프랑스를 순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프랑스의 옛살'을 걸은 셈이다.
올 가을에는 이번에 갔던 프랑스길의 소도시와 함께 지중해 연안도시로 이어지는 '남프랑스 소도시 기행'을 기획해 보려고 한다. '빅토리아폭포-나미비아사막-케이프타운'으로 이어진 남아프리카기행 그리고 '요세미티-샌프란시스코-나파밸리/실리콘밸리-하와이'로 이어지는 캘리포니아기행과 함께 <월간 고재열>의 끝판왕 중 하나가 될 여행이 되리라고 예상한다. 올 가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