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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Oct 06. 2023

육체노동의 희열에 취하다

한 달 동안 일본 알프스, 카자흐스탄 천산산맥, 알프스에서 일했다


부러진 안경을 쓰고 한 달을 여행했다. 이전 여행에서 안경이 부러져 처음으로 다초점렌즈로 안경을 맞췄는데, 출국일까지 안경이 나오지 않아 부러진 안경을 계속 쓰고 다녔다. 전쟁영화에 가끔 나오는, 깨진 안경을 쓰고 표적을 노려보는 저격수처럼. 


8월과 9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8월엔 몽골 초원에서 16박17일 동안 텐트에 머물렀다. 한국에서도 안 하던 장박을 몽골에서 한 셈이다. 초원이 주는 고기와 육가공품과 고깃국물을 주로 먹으면서. 이건 뭐 여행감독인지, 목동인지. 



9월엔 트레킹 여행을 연달아 세 개 진행했다. 일본알프스 트레킹, 천산산맥 트레킹 그리고 알프스 트레킹. 3000m 이상 고봉을 5개 이상 올랐던 것 같다. 하루 2만보 안팎의 산길을 산책하듯이 걸었다. 이건 뭐 여행감독인지, 산악인인지. 


고산 트레킹, 사막 트레킹, 빙하 트레킹. 외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길을 한 달 동안 걸었다. 여행 ‘금사빠’라 어느 길에서건 감탄할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어서 지겹지 않았다. 반할만한 걸 발견해 내야 발걸음에 힘이 붙어서 열심히 눈으로 스캔하면서 걸었다. 



여행감독은 돈 받고 여행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8/9월에 단내가 나는 여행들을 연이어 진행하면서 그리 복에 겨운 직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노동으로 버틴 두 달이었다. 1년 중 가장 험한 구간을 8~9월에 지나는데, 그만큼 몸으로 느끼는 감동도 컸다. 


위로가 되는 사실은 각각의 여행에 현장 여행감독이 별도로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들이 가장 힘들었다. 위로가 안 되는 사실은 현장 여행감독보다 더 난감한 판단을 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는 점. 이건 누구에게 맡길 수도 없으니. 



길이 거칠어지면 먹는 것도 거칠어지고 잠자리도 거칠어진다. 거친 음식과 거친 잠자리로 점철된 두 달이었다. 그래도 알마티에선 5성급 호텔에 묵기도 했고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숙소들은 두루 좋았다. 일본에서도 온천이 나오는 숙소였고. 힘든 몸을 달래준 그 숙소들에 깊이 감사한다. 


거친 환경 속에서도 함께 여행 한 사람들은 거칠어지지 않았다. 더 배려했고 더 온화하게 대했다. 파도가 오면 함께 넘어섰고 풍랑이 일면 서로를 붙들어 맸다. 그런 면에서는 충분히 복된 두 달이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도 없었다.  



여행감독으로서 가장 큰 소득은 다음 여행에 대한 그림이 선명해졌다는 점이다. 투우사를 죽이는 것은 소가 아니라 청중의 박수소리라는데, 여행감독을 움직이는 힘은 클럽 멤버들의 박수소리가 아니라 스스로 치는 박수소리인 것 같다. 여행지에 대한 감탄이 모든 피로를 녹인다. 


내년엔 ‘일본 트레킹 오마카세’의 도야마현 버전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겨울에 진행할 설국 트레킹 장소도 봐두고 왔다. 내년 천산산맥 트레킹 때는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려고 한다. 키르기스스탄엔 답사도 함 가보고. 아드리아해 기행은 ‘소도시기행’ 버전으로 해보려고 한다. 발칸기행은 ‘인문기행’으로 해보려고 하고. 



여행에서 늘 여행을 생각하게 된다. 식사를 하면서 다음엔 뭐 먹을까 고민하듯이, 여행을 하면서 다음 여행지를 구상했다. 가본 곳이 많아지면 가보고 싶은 곳도 많아진다. 그곳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거기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비교해 싶어 진다. 여행에 지치면서 도리어 여행을 꿈꾸고 왔다. 


알프스 트레킹은 너무 좋았다. 돌로미테가 트레킹의 여왕이라고 불리는데, 알프스가 황제였다. ‘알파인’ 구간은 가지 못하더라도 절묘함 ‘베타인’ 구간은 여럿 발견했다. 이것 역시 잘 큐레이션 해보려고 한다. 좋은 여행은 ‘다시 올 이유’를 들고 오는 것인데, 좋은 핑계를 많이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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